나는 어떤 내용으로 이해될 것인가

김초엽의 <관내분실>을 읽고

by 조르바




정재찬 교수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도무지 부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라니. 공대생이라면 시와 담을 쌓고 살 것이라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과학이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감수성과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영 거슬렸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밝히자면 나는 '문과'였다.

그런데 김초엽의 소설을 읽은 뒤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나마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훌륭했다. '너무나'라는 감탄은 작가의 나이와 대학에서의 전공을 고려한 기대 수준이 그렇게 높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기에.

독서 모임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추천했다. 한 분이 이 소설집을 읽다가 울었다고 했다. 시를 쓰는 분인데 SF는 처음이라고 했다. 이쯤 되면 '시인의 가슴을 울린 공대생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분이 평소 눈물을 잘 흘린다는 점은 참작해야 한다.


단편 <관내분실>은 '육체적 죽음 이후의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같은 묵직한 질문뿐 아니라, 아이의 존재와 여성의 정체성 같은 현실적 문제들을 짧은 이야기 안에 자연스럽게 담았다. 여기에는 철학적 성찰이나 페미니즘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거리감이 거의 없다. 과학이라는 배경이 인간의 감정과 정말 잘 어우러진다. SF라는 형식이 진지한 주제를 얼마나 흥미롭게 다룰 수 있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주위 사람들과의 육체적 이별이 쌓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본능적인 감정과 여러 가지 현실 문제들이 뒤섞이면서 생각은 정리되지 않는다. 그런데 육체가 사라진 인간의 영혼을 데이터화할 수 있다는 가정은 헤어진, 그리고 헤어질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소설은 데이터 이식으로 영혼을 담은 마인드를 통해 망자와 만날 수 있는 세계에서 송지민이라는, 곧 엄마가 될 여성이 분실된 '엄마'를 찾는 과정에서 '김은하'라는 새로운 존재를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다.

형태를 가진, 죽은 이의 정신과 만나는 마인드 접속기가 도서관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도서관의 책들도 인간의 정신을 보존하고 그 정신에 접속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가.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할 수 있느냐다. 김초엽은 추모, 산 자와 죽은 자의 단절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은하가 살아 있을 때 이미 어떻게 세상과 단절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마인드 업로딩이라는 기술을 등장시키면서도 결국 인간 사이의 관계는, 그리고 인간의 존재는 죽은 이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내용으로 이해되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마인드에 대한 논란을 대하면서 지민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삶은 단절된 이후에도 여전히 삶일까.

접속 불가와 소멸의 차이, 인덱스와 마인드 검색 등 소설은 갖가지 은유들이 조각보처럼 이어져 있는데 꿰맨 자국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성우 송도순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방송일로 바빴던 송도순은 미안한 마음에 핸드백이나 코트 같은 물건을 사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유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어머니는 "나 죽고 난 뒤 도순이가 이것들 다 치우려면 마음 아프지 않겠느냐"며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유품이란 그런 것이다. 엄마를 특정할 물건으로가 아니라면 엄마는 검색되지 않는다.

김초엽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보코프의 말이 떠올랐다. "과학자는 우주의 한 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 시인은 시간의 한 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느낀다." 과학도였지만 시인의 감성을 지닌 SF 작가는 공간과 시간의 교차점에서 무엇을 보고 느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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