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는 직원 얼굴만 봐도 8할은 맞힙니다

22년 차 고인 물의 퇴사자 분석기

by 기억하는 나비

한 직장에서 22년. 이쯤 되면 '고인 물'을 넘어 '암반수'라 불러도 할 말이 없다.


나라고 처음부터 이 자리에 화석처럼 박혀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입사 1년 차, 누구나 겪는다는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나 역시 매일 아침 가슴팍에 사직서를 품고 출근했었다. '나 여기 안 다녀!, 그만둘 거야!'를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되뇌던 시절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보다 먼저 용기 내어 이 정글을 떠나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한 것은.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떤 믿는 구석이 있어서 사표를 던진 걸까? 부러움 반, 호기심 반으로 시작된 관찰이 어느덧 20년을 훌쩍 넘겼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참 많은 이들의 마지막 뒷모습을 배웅했다. 떠나는 이유는 실로 다양했다.

연봉 앞자리를 바꿔 더 좋은 조건으로 떠나는 '영전(榮轉) 형', 아예 전공을 바꿔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는 '환골탈태형', 아이 곁을 지키기로 결심한 '전업맘/대디 선언형', 훌쩍 비행기에 몸을 싣는 '유학/워홀형', 그리고 몸과 마음이 번아웃되어 일단 멈춤을 택한 '요양형'까지.


그 수많은 이별을 지켜보며 22년간 빅데이터가 쌓이다 보니, 나에게도 뜻밖의 전문 분야가 하나 생겼다. 이름하여


'사자 관상학'이다.


"저 퇴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직원의 얼굴만 쓱 봐도, 이제는 그 사유를 8할은 맞힌다. 거짓말 같지? 진짜다.


이미 갈 곳이 정해진 직원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안광(眼光)'이 서려 있다.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가 있고, 죄송함으로 포장했지만 어깨는 한없이 가볍다. 그 표정은 '나 탈출 성공했어'다. 가장 부러운 유형이다.

반면, 새로운 공부나 유학을 선택한 이들의 얼굴엔 '비장함'이 감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설렘이 복합적으로 섞여 묘한 긴장감을 만든다.

건강 문제나 번아웃으로 쉬러 가는 직원의 얼굴은 안쓰럽게도 '초탈(超脫)'의 경지다.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어 '더 이상은 무리'라고 얼굴 근육 전체가 외치고 있다. 이럴 땐 선배로서 진심으로 따뜻한 위로를 건네게 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장 부러웠던 건 역시나 더 좋은 곳으로 보란 듯이 이직하는 직원들이었다. 나는 용기가 없어서, 혹은 현실에 안주하느라 주저앉은 이 자리에서, 그들은 날개를 달고 날아갔다. 그들의 당당하고 빛나는 마지막 인사를 받을 때면, 겉으로는 쿨하게 축하해 주면서도 속으로는 쓰린 속을 달래려 저녁 소주 안주를 고민하곤 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새로운 유형의 퇴사자들도 볼 수 있다. 힘들다 또는 부당하다는 이유를 달고 아무런 계획이 없이 퇴사하는 직원들이다. 이들의 퇴사 후 행보는 아직 데이터가 적다. 새로 생긴 유형의 퇴사자들은 또 다른 나의 관찰대상이 되었다.


퇴사자들의 표정을 읽어내는 쓸데없는 능력이 늘어갈수록, 김 차장의 술잔은 더 깊어진다. 자, 오늘은 누구의 안녕을 빌며 한 잔 기울여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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