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고비의 마법도 정체기를 맞았다.
최대 용량인 2.4mg을 투여하고 있지만, 초반처럼 체중계 숫자가 수직으로 낙하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프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더디게 움직였다. 예전 같았으면 '약발이 다 된 건가', '다시 살이 찌면 어떡하지' 하며 불안에 떨었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다.
숫자의 변화는 더뎌졌지만, 내 삶의 질은 수직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변화는 수면 패턴이었다. 야식과 폭식이 사라지자 부대끼는 속을 부여잡고 뒤척이던 밤이 사라졌다. 밤 10시면 기분 좋은 나른함이 밀려와 잠자리에 들었고, 새벽 5시 반이면 알람 없이도 눈이 번쩍 뜨였다. 개운한 아침. 몇 년 만에 느껴보는 감각인지 몰랐다.
나는 큰 결심을 했다.
'달려보자.'
그길로 백화점에 가서 가장 눈에 띄는 형광 주황색 러닝화를 샀다. 예전에는 '뚱뚱한 주제에 튀는 걸 신었네'라는 비아냥이 두려워 무채색 운동화만 신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 화려한 신발은 내가 세상 밖으로 힘차게 발을 내딛겠다는 선언이었다.
처음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렸던 날을 기억한다. 겨우 3km를 뛰고 폐가 찢어질 것 같아 벤치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터질 것 같던 심장이 차츰 규칙적인 리듬을 찾았고, 납덩이 같던 다리에 탄력이 붙었다.
3km에서 멈추던 발걸음이 어느새 5km를 가뿐히 넘어서고 있었다.
땀범벅이 되어 헉헉대면서도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다. 그것은 살이 빠질 때의 쾌감과는 결이 다른, 훨씬 단단한 자신감이었다. 내 심장과 근육이 오롯이 나의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감각. 운동이 이렇게나 좋은 것이었다니! 나는 비로소 '활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이 건강한 변화는 회사 내 '걸어 다니는 확성기' 김지숙 부장을 통해 소문이 났다. 남의 사생활에 24시간 귀를 열고 사는 그녀의 레이더망에 내 새벽 일과가 포착된 것이다.
"어휴, 수연 차장. 새벽마다 미친 듯이 뛴다며? 살 빼려고 아주 독기를 품었네, 품었어. 그러다 무릎 다 나가. 본인 나이를 생각해야지?"
그녀는 탕비실에서, 화장실에서, 내 '독한 새벽 러닝'을 가십거리로 씹어댔다. 아마도 '약물 의혹'에 이어 '지독한 다이어트 강박' 프레임을 씌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 부장의 뒷담화가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회사 내에 숨어 있던 '러너'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버린 것이다. 점심시간, 평소 대화 한번 나눠본 적 없던 마케팅팀 대리가 쭈뼛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저기... 차장님. 김 부장님한테 들었는데, 새벽 러닝 하신다면서요? 실은 저도 요즘 뛰기 시작했는데,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어서요. 혹시 비결이 있으신가 해서..."
그뿐만이 아니었다. 옆 부서 인싸 현영 대리가 사내 메신저로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차장님, 혹시 제가 활동하는 러닝동호회 들어오실래요? 안 그래도 신입 회원 모집 중인데, 관심 있으시면 초대해 드릴게요!]
김 부장의 악의적인 확성기가 뜻밖에도 건강한 소통의 창구가 되어버렸다.
나는 메신저 창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위고비가 닫혀 있던 내 방문을 열어주었다면, 새벽 러닝은 굳게 닫혀 있던 세상으로 나가는 문을 활짝 열어젖힌 셈이었다.
"응, 현영대리. 너무 고마워요. 가입할께요!"
나는 망설임 없이 답장을 보냈다. 형광색 러닝화의 끈을 단단히 묶었다. 나의 인생 달리기는 지금이 진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