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잘 뛰잖아!

러닝동호회

by 기억하는 나비

"차장님,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우리 동호회 정기 러닝 있는 날인데, 같이 가요!"


옆 부서 현영대리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건넸다. 지난주 메신저로 가입 의사를 밝힌 후, 드디어 첫 참석이다. 설레는 마음을 감추고 짐짓 쿨한 척 대답했다.


"그래, 현영대리. 어디로 가면 돼?"


사실 어제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 운동복을 새로 샀다. 형광 주황색 러닝화에 맞춘 세련된 네이비 컬러의 기능성 티셔츠와 러닝 쇼트팬츠.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은 예전의 구부정하고 푸석했던 김수연이 아니다. 탄탄해진 다리와 곧게 펴진 어깨,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가진 완벽한 '러너'의 형상이었다.


약속 장소인 한강공원에 도착하니 이미 십여 명의 사람이 모여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꽉 끼는 타이즈를 입은 젊은 남녀들 사이에서 잠시 위축될 뻔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나, 매일 새벽 5km씩 뛴 여자야. 위고비로 시스템 고치고, 내 의지로 다진 체력이라고.'


현영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고 간단히 몸을 푼 뒤, 드디어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목표는 반포대교까지 왕복 6km. 페이스 메이커를 맡은 회장을 따라 일정한 속도로 발을 맞추었다.


코끝을 스치는 시원한 강바람, 규칙적인 운동화 발자국 소리, 그리고 함께 달리는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 그 모든 것이 하모니처럼 어우러졌다. 1km, 2km... 거리가 늘어날수록 예전 같으면 벌써 헉헉대며 뒤처졌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새벽마다 쌓아온 마일리지는 배신하지 않았다. 내 호흡은 안정적이었고, 다리는 가벼웠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보다 한참 어린 여성 멤버 몇 명이 벌써 페이스가 흐트러지며 뒤처지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는 그들을 지나치며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노땅이라고 은근히 무시당하기 일쑤였는데... 나, 꽤 잘 뛰잖아!'


가장 뿌듯했던 건, 거울 속 내 외모가 아닌 내 '실력'에 만족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였다. 살을 빼고 나면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고, 더 예쁜 옷, 더 진한 화장에 집착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건강한 몸을 갖고 나니, 외모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었다. 땀 흘리며 한계에 도전하는 내 모습 그 자체가 자랑스러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을 빼고 나서야 비로소 외모에 집착하지 않는 진짜 쿨한 내가 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사무실에 들어서니 김지숙 부장이 탕비실에서 나오며 눈을 흘겼다.


"어유, 김 차장. 어제 동호회 나갔다며? 아주 미친 듯이 뛰었다고 사방팔방 소문이 났더니만."


그녀는 내 뒷조사를 집착 수준으로 하고 다니는 게 분명했다. 예전 같으면 "그냥 좀 뛰었어요..." 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겠지만, 이젠 다르다.


"네, 한강 뛰니까 정말 좋더라고요. 부장님, 운동에 젬병인 거 알지만, 가끔 나오셔서 뛰어보세요. 체력이 달라져요."


꼿꼿이 허리를 펴고, 김 부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순간 김 부장의 동공이 흔들렸다. 대놓고 주던 모욕이 사라진 자리엔 찜찜함과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아마 또 뒤돌아서면 "약 처먹고 빼더니 눈 뵈는 게 없나 봐" 하며 헛소문을 퍼뜨리겠지만, 난 상관없다. 내 눈빛이 달라졌고,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의 크기가 달라졌으니까.


저녁에 열린 동호회 뒤풀이 자리. 남자 회원들과 둘러앉아 거리낌 없이 치맥을 즐겼다. 예전엔 덩치 큰 여자라 남자들이 불편해할까 봐, 혹은 실수할까 봐 숨소리조차 크게 못 냈던 나였다.


"수연 씨, 아까 페이스 유지하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정말 멋지던데요?"

"맞아요, 누님. 저보다 훨씬 안정적이시더라고요. 다음에 같이 lsd(Long Slow Distance) 훈련 가요!"


젊고 새침한 회원들에게만 쏟아지던 관심이, 오늘은 나에게 향했다. 그런데 신기했다. 내가 남자 회원들의 관심을 끌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오히려 그들이 나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오고 대화를 주도했다.


살을 빼고 나니 오히려 이성에 대한 '결핍'이나 '집착'이 줄어들고 자연스러워졌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 실력에 만족하니, 남자들을 '이성'이 아닌 '동료 러너'로 편안하게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남자들이 젊고 예쁜 여자보다, 편안하고 당당한 나에게 더 끌리는 이유를 새삼 깨달았다.


'아... 연애도, 인간관계도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내가 먼저 단단해져야 세상이 나에게 맞춰지는 거였어.'


술잔을 부딪치며 활짝 웃었다. 김수연, 너 이러다 연애 고수 되는 거 아냐? 새벽 공기 속에서 러닝화 끈을 묶던 그날의 용기가, 내 삶을 이렇게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줄 줄이야. 정말, 신기하고 감사한 밤이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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