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할 때 느끼는 심장박동은 익숙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온몸의 혈관이 요동치는 그 감각. 하지만 오늘 느껴지는 이 떨림은 러닝화 끈을 묶을 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수연 씨,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어때요?"
러닝 크루 단톡방이 아닌, 개인 메시지로 온 도윤의 짧은 한마디. 그것이 며칠째 내 마음을 공중부양시키고 있었다. 크루 리더로서 늘 모두를 아우르던 그가, 나에게만 따로 '시간'을 물어본 것이다.
약속 장소에 나가기 전, 나는 거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예전 같으면 몸을 가리기 급급해 펑퍼짐한 옷들을 골랐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부드러운 살구색 실크 블라우스와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h라인 스커트를 선택했다. 거울 속의 나는 낯설 만큼 화사했다.
"여기예요, 수연 씨."
약속 장소인 작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난 도윤은 러닝복을 벗고 댄디한 셔츠 차림이었다. 늘 땀에 젖은 모습만 보다가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은은한 향수 냄새를 맡으니, 그가 '러닝 크루 리더'가 아닌 '남자'로 확 다가왔다.
식사가 시작되고, 나는 습관적으로 메뉴판의 칼로리를 계산하려다 멈칫했다. 도윤은 그런 나를 눈치챈 듯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lsd 훈련 대비해서 탄수화물 보충한다고 생각해요. 여기 라자냐 정말 맛있거든요."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우리는 러닝 이야기로 시작해 각자의 직업, 좋아하는 영화,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윤은 내가 위고비로 살을 뺐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새벽을 깨웠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단단해졌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연 씨는 처음 봤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보기 좋아요. 단순히 살이 빠져서가 아니라, 눈빛에 에너지가 생겼거든요. 스스로를 믿는 사람 특유의 그 빛이요."
도윤의 시선이 내 눈에 머물렀다. 예전의 나였다면 "살쪄서 보기 흉했죠?"라며 자폭 섞인 농담으로 분위기를 망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의 칭찬을 피하지 않고 오롯이 받아들였다.
"칭찬 고마워요, 도윤 씨."
와인 잔을 부딪치는 순간, 테이블 아래로 살짝 스친 그의 온기가 전율처럼 퍼졌다. 0.5mg의 용기가 가져다준 것은 단순한 체중 감량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호의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그리고 다시 누군가를 설레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레스토랑을 나와 밤거리를 걷는데, 도윤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적당히 거칠었으며, 아주 단단했다.
"다음 주말에도 시간 비워줄래요? 이번에도 러닝화 벗고 만나요."
그의 제안에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손을 꽉 맞잡았다. 가슴속에서 몽글몽글한 거품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30대 후반, 연애는 이미 끝난 페이지인 줄 알았는데. 위고비가 내 몸의 시스템을 리셋해 주었다면, 도윤은 내 멈춰있던 연애 세포를 다시 숨 쉬게 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코끝이 찡해졌다.
나를 사랑하기 시작하자, 세상이 나를 사랑할 준비를 마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밤은 그 어떤 주사보다 강력한 '설렘'이라는 약에 취해 잠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