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한 지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지만, 고3 새 학기 첫 등교날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으시던 순간만큼은 여전히 어제처럼 선명합니다. 환한 미소로 들어서실 때 울려 퍼진 박수와 함성소리, 고백하건대 다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12년간 열두 분의 담임을 거치면서, 학생들의 반응도 자동 재생 모드가 되어버렸습니다. 새로 편성된 반은 낯익은 친구들로 가득했고, 입시와 졸업이 코앞에 다가온 터라 담임이 누구라 한들 큰 위안이나 설렘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선생님의 첫 아침조회는 이제껏 졸린 눈을 비비며 경직된 자세로 듣던 시간과는 사뭇 달랐지요. 마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키팅 선생이 스크린을 찢고 현실로 걸어 나온 듯했으니까요.
촌지 안 받는 교사
곧 학부모 면담이 시작된다는 공지에 학생들은 “네.” 하고 영혼 없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촌지는 받지 않을 거야. 그러니 편하게 오시라 전해드려.”
그 말씀을 남기고, 수업 잘 들으라는 인사와 함께 교실을 나가셨습니다. 멍하니 문 쪽만 바라보다가, 삼삼오오 모여 서로 물어봤습니다.
“더 달라는 얘긴가?”
집에 가서 들은 대로 전하니 부모님도 믿지 않으셨습니다. 선생님의 입에서 ‘촌지’라는 단어가 직접 나온 것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처음이라, 생소한 상황을 쉽게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1주일간의 학부모 면담을 마친 다음 날 아침조회, 선생님은 수십 개의 흰 봉투를 보여주셨습니다. 촌지 주인의 자녀들을 따로 불러 일일이 돌려주자, 며칠 후 다시 등장한 흰 봉투 3개.
학부모들이 불쾌감을 표하며 윗선을 통해 전달해 왔다 하셨고,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재차 학생들에게 되돌려주기보다는 곧 있을 체육대회 때 간식비로 쓰면 어떻겠냐며 의견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활짝 웃으며 “좋다” 하고 화답했습니다.
불문율처럼 지켜온 관행 앞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본 적도, 감히 따를 수도 없었던 저희가, 그날 처음으로 올바른 가치관을 갖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약속대로 체육대회 때 푸짐한 간식을 제공해 주셨고, 뒷짐을 지고 계셨던 옆반 선생님들과 달리 저희와 함께 신나게 어울리며 춤도 추셨습니다. 그때 진심으로 환호하며 터져 나왔던 저희의 박수와 함성소리, 기억하시나요?
반장 선거는 마치 월드컵 축구경기를 보는 듯, 손에 땀을 쥐게 했습니다. 선생님은 “후보 지명에 성적 우위 등 자격 제한을 두지 않겠다.”라고 하셨지만, 경험해 본 적이 없어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장은 모범생이 일찌감치 당선되었고, 하이라이트는 부반장 선거였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와 인기 많은 아이가 최종 후보로 올라, 기존 관습대로 갈 것인지, 과감히 틀을 깰 것인지에 대한 내적 갈등이 상당했습니다.
첫 투표결과 33대 33 동점이 나오고 재투표에서도 다시 동점, 거수로 3차 투표까지 진행했는데도 여전히 동점이 되자, 학원 제치고 끝장을 보자며 긴장감과 재미가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본인에게 선택권을 준다면 밤새 고민한 뒤 결정해 오겠다”며 정중히 요청하셨고 모두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내심 큰 기대는 없었지만요.
하지만 날이 새고 아침조회 때 선생님의 최종 선택이 발표되자, 학생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몸이 얼어버린 당사자는, 염색이 채 빠지지 않은 노랑머리 그대로 이튿날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동장 교단에 올라, 당황한 교장선생님과 학년 선생님들의 찌푸린 눈살 속에서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그 찰나, 아이는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 날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학업에 매진한 결과, 그해 겨울 홍익대학교에 합격했습니다.
점점 아침조회가 어미새를 기다리는 새끼 새들처럼 반갑고, 담소를 나누듯 정겨워졌습니다.
이과, 문과보다 대학 진학률이 낮아 ‘눈엣가시’ 취급을 받던 예체능반의 차별에 맞서 홀로 싸우셨던 선생님을 위해 하나둘 마음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지 버릇 개 못 준다며, 여름방학이 되자 몸이 근질거려 결국 보충수업을 땡땡이치고 팥빙수 가게로 우르르 뛰쳐나갔습니다. 방과 후 교무실로 전부 불려 가고, 주변의 혀 차는 소리와 손가락질 속에서도 선생님은 말없이 손바닥 다섯 대로 체벌하셨습니다.
그때 누구 하나 이죽거리지 않고, 붉어진 손바닥만 내려다보았죠. 저도 모르게 “아프다...!” 하고 뱉었던 말은, 손이 아닌 믿어준 사람에게 실망감을 안겼을 때의 죄송함과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단 한 명도 반에서 이탈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겨울 모의고사 때, 믹스커피 가루가 담긴 종이컵을 한 명 한 명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손수 10L 양은 주전자로 힘껏 들어 정성스레 온수를 부어주셨던 선생님과, 책상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66개의 커피잔은, 그 향기와 함께 지금도 아름다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의 여정을 어딘가에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배우가 꿈이라고 하자, 선생님은 핀잔 대신 격려와 응원만을 주셨습니다. 졸업 후 지난 20년 동안 크고 작은 공연을 빠짐없이 보러 와주셨고, 최근 영화 시사회 때도 자리를 빛내주셨을 때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비단 저에게만 그러셨을까요. 수많은 제자들에게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을 주고 계신 선생님을 생각하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밀려옵니다.
비단 저에게만 그러셨을까요. 수많은 제자들에게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을 주고 계신 선생님을 생각하면, 말로 다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밀려옵니다.
1990년 극장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며 소리 죽여 울었던 이유는,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키팅 선생을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숨 막히게 획일화된 학교 사회, 집 안까지 들어와 촌지를 받아가던 교사, 학생들 앞에서 대수롭지 않게 가해지던 폭력적 체벌 속에서, 참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마치 낭만을 품은 환상과 같았으니까요.
그러나 거짓말처럼 2년 뒤 실제로 키팅 선생을 만났고, 그 후로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더 이상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대학 시절, 잠시 귀향했다가 광주 민주화운동의 참혹한 광경을 생생하게 기록한 일기(역사박물관 소장)와, 2016년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아흔 살의 노모와 함께 세월호 참사 추모와 대통령 탄핵을 향해 촛불을 밝히시던 모습을 보았을 때, 선생님이 여전히 저의 키팅 선생으로 남아 계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오마이뉴스>에서 글쓰기를 시작하며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꼭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이유는, 오래전에 적어두었던 미담 보따리를 모두 풀어놓을 순 없어도 선생님의 숭고한 여정을 어딘가에 기록해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불현듯 스친 생각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선생님께 문자를 드려 퇴임 시기를 여쭤보았습니다.
그러자, 올 2월에 퇴임하셔서 첫 연금을 받았다고 답장을 주셨습니다. 잠시 손을 멈추고 차오르는 먹먹함을 추스른 뒤, 예를 갖춰 글을 이어 나갑니다.
선생님, 제 인생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1992년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학이란 관문보다
삶의 근본을 먼저 심어주시고, 없을 거라 포기했던 진정한 스승을 만날 수 있었으니, 저에게는 더없는 행운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존함인 '양영아'는 이응이 많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늘 농담처럼 말씀하셨지만, 그 동그라미 하나하나가 제자들을 두 팔로 감싸 안아주고픈 울타리는 아니었을까요.
영화에서처럼 책상 위에 올라서서, 선생님의 새로운 인생 2막을 온 마음 다해 응원해드리고 싶습니다.
저와 수많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든든한 나침반이자 영원한 키팅 선생으로 남아 계실 것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오! 캡틴, 마이 캡틴.
그때 진심으로 환호하며 터져 나왔던 저희의 박수와 함성소리, 기억하시나요?
2023. 5. 30. 오마이뉴스 <배우 차유진 에세이> 게재
2025. 8. 18. 글 개정. <브런치>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