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오전 11시, 습관처럼 들었던 CBS 라디오 <신지혜의 영화음악>. 첫 오프닝 인사에서 오늘이 마지막 방송이라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하던 일을 멈출 만큼 놀랐다. 1998년 시작해 어느덧 25년을 이어온 프로그램이었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았다.
<신지혜의 영화음악>을 유독 좋아했던 이유는 신지혜 아나운서의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노련하면서도 담백했고, 도회적이면서도 따스했다. 긴장을 풀어주듯 깊이 있는 목소리를 들을 때면 1시간이 짧게 느껴질 만큼 아쉬웠다. 음악 사이로 스며드는 군더더기 없는 멘트는 명곡보다도 더 빛나는 명품이었다.
25년의 마침표
그녀의 <헤어질 결심>을 앞두고 두말없이 배웅하고 싶었지만, 동경하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서운함에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기획·연출·진행까지 1인 제작으로 꾸려온 만큼 애정과 부침이 태산 같았을 텐데, 내려놓기가 어디 쉬웠을까. 별다른 동요 없이 선곡이 절반쯤 흐른 뒤에야, 안정된 음색으로 하차 이유를 밝혔다.
"퇴사하게 되었고, 이유는.... 때가 되었다."
덤덤한 소회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오랜 시간 팬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깔끔하고 멋진 답변이었다.
평소 라디오 DJ를 존경해 온 이유는 묵묵한 일관성 때문이다. 배우는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듯 변화를 거듭한다. 역할마다 다른 시대로 떠나는 시간여행자처럼 끊임없는 변신과 적응이 늘 과제다.
반면 라디오 DJ는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킨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컨디션으로 임하는 것은 보통의 내공과 인내심으로는 버거운 일이다. 그들을 꾸준히 버티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엄마는 라디오를 왜 좋아해?”
평생 라디오를 옆에 두고 들어온 엄마에게 물었다.
“예쁘게 말하는 법을 배워.”
그러면서 TV 없이는 살아도 라디오는 꼭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엄마는 아침을 준비하러 부엌에 들어가실 때마다 가장 먼저 라디오를 켠다. 고정된 주파수를 저녁까지 들으며 자연스레 시간대별 DJ 이름도 외우게 되었단다. 휴가로 자리를 비우면 언제 돌아올까 궁금해하고, 감기로 코맹맹이 소리가 들리면 하루빨리 회복하기를 바라신다.
외출할 때도 엄마는 라디오를 끄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면 음악과 나지막한 목소리가 온기처럼 반겨준다. 라디오는 나이만큼 깊어진 적막을 달래주는 고마운 벗이다.
무수한 질문에 막힘없이 답하는 AI가 생활 깊숙이 자리했어도, 라디오와는 비교할 수 없다. 다양한 목소리와 삶의 이야기가 흘러넘치며, 공감과 위로를 주고받는 라디오 안에는 진짜 사람이 있다.
25년보다 더 오래
마지막 엔딩곡을 남겨놓고 그녀가 클로징 멘트를 읽어 내려갔다.
"<은하철도 999>에서 철이의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고 메텔은 이야기하죠. "철아, 나는 네 청춘의 어스름한 그림자...!" 어쩌면 저는 여러분들 청춘의 어스름한 그림자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가 도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하죠. "자, 이제 어디로 떠나볼까...!" 지금제 마음이 딱 그런 것 같네요. 자, 도비는 free입니다! <해리포터 中 대사>"
다이애나 로스와 라이오넬 리치의 <Endless Love> 킬링파트가 울려 퍼지며 그녀의 목소리는 단정히 사라졌다. 하지만 감동의 여운은 영화보다 더 진하고 향기롭게 남았다. 그녀의 덕후답게 나도 차분히 작별을 고했다. 마지막 방송을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라고 마음속에 되새기며 살아도, 늘 곁에 있으면 잊기 쉽다. 결국 또 눈물의 작별식 앞에 서고 말았다. 슬프지만 그녀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하며, 작은 욕심이라며 끝에 남긴 “그래도 영화음악은 신지혜가 최고였지”라는 바람도 이루어 주고 싶다.
당신이 걸어온 25년보다 더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신지혜의 영화음악>은 하루도 빠짐없이 최고였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안녕, 나의 신디.
CBS <신지혜의 영화음악> :
첫 방송 1998년 2월 2일 ~
마지막 방송 2023년 10월 31일
* 덧붙이는 말
신디처럼 쿨하진 못할 것 같다. 그녀의 향후 행보가 모두 확인 가능한 SNS 세상이라, 우선 인스타 팔로우부터 고고씽!
#신지혜의 영화음악 #신영음 #신디
#쿨하지못한애청자 #좀만더질척댈게
사진 <오디너리 매거진> 발췌
2024. 11.17. 오마이뉴스 <배우 차유진 에세이> 게재
2025. 9. 5. 글 개정. <브런치>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