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흐른다, 강물처럼.

by 차유진



드라마 전체리딩 날이었다. 배우와 스태프가 처음 얼굴을 맞대는 자리이며, 넓은 리딩룸에 들어서는 순간의 어색함은 새 학기 첫날 교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인데도, 지병처럼 찾아오는 낯설음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러다 예전 작품에서 함께했던 동료가 인사를 건네오면, 같은 반 친구를 다시 만난 듯 잠시 숨이 놓인다.


하지만 긴장감은 금세 되살아난다. 이름이 적힌 팻말과 대본이 놓인 자리를 찾아 앉는 순간, 잠시 풀렸던 어깨는 다시 굳어간다. 쉬어냈던 시간만큼 떨림도 커진다.


배우라는 직업은 ‘처음’이라는 문턱을 유난히 자주 넘는다. 작품에 들어가면 입사, 끝나면 퇴사다. 1년에 여러 번 새 출발을 맞기도 한다. 수많은 낯선 얼굴들과 초면의 공기를 크게 한번 들이마시고는 주어진 여정을 걸어 나간다. 작품이 쌓이면 여유가 생길 법도 하지만, 매번 출발선 앞에 설 때마다 초기화되어 있는 자신을 실감한다.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는 풍경을 복학생처럼 멀찍이 바라보다가, ‘나만 처음 앞에서 겁을 먹고 있나...!’ 싶어 고개가 숙여질 즈음이었다. 그때 배우들 사이사이에 살포시 놓인 꽃다발. 휘둥그레진 눈으로 정체를 궁금해하자, 감독님이 직접 준비한 선물이라는 제작진의 귀띔이 들려왔다.


잠시 후, 감독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오늘의 '첫 만남'이 설레어서... 어젯밤 한숨도 못 잤습니다.”


입봉작을 위해 걸어온 긴 시간과 선장으로서의 부담을, 감사의 꽃으로 대신 전한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가 쥐고 있던 긴장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이어 작가님도 두 손을 모은 채 일어나 말했다.


“드라마 집필이 ‘처음’이었는데, 캐스팅 명단을 받을 때마다 제가 복 받았다고 느꼈습니다. 모두가 제 ‘첫사랑’이 될 것 같습니다.”


작가라는 높은 자리 뒤에 숨지 못할 만큼 목소리는 떨렸고, 소감은 수줍은 고백처럼 들렸다. 전날까지 수정 대본이 오갈 정도로, 무탈한 첫 출항을 위해 온 힘을 쏟아온 흔적이 역력했다.


노장 선생님들 역시 모든 작품을 늘 첫 작품으로 대한다며, ‘처음’의 떨림을 굳이 숨기지 않으셨다. 매번 마지막 작품이라는 마음으로 임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주연을 맡아 기쁘다면서도, 그만큼 무거운 책임을 안고 있다며, 소회를 담담히 전하셨다.


혼자만 눌려 있는 줄 알았던 ‘처음’의 중압감을 고해성사하듯 다 함께 공유하고 나니, 무거웠던 마음의 짐도 어느덧 설렘으로 일렁였다. 유일하게 이 모든 상황에서 초연했던 존재는 극 중 캐릭터로 참석한 강아지 ‘까르’뿐이었다. 내년 연기 은퇴를 앞둔 까르는 바닥에 배를 붙인 채 나른하게 강냉이 간식을 즐기며 흔들림 없는 평온함을 보여주었다.


여느 때보다 일이 귀한 시기였던 탓인지, 단막극임에도 모두가 ‘처음’이라는 우주 안에 함께 들어와 있었다. 그 초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촬영 내내 더욱 진중히 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첫 촬영에 나서기 전까지 배우들은 끊임없이 역할을 사전 점검한다. 대본 숙지, 의상, 소품까지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신기하게도 리딩에서 떨림을 고백하던 이들이 촬영장에서는 티끌만큼의 실수도 보이지 않는다. ‘처음’의 긴장감을 넘어설 만큼 충분히 준비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촬영 중간중간 나누는 정담은 단비처럼 서로를 위로하고 지탱해 준다. 문득 여쭙고 싶었다. 선생님들은 때때로 조여 오는 삶의 고비를 어떻게 넘어오셨는지. 하지만 고된 현장에 묵묵히 임하는 모습만으로도 고목처럼 단단히 버텨온 세월이 느껴져, 품고 있던 질문은 어느새 사소한 먼지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촬영은 흐르는 강물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감독님은 배우들 사이 어색함을 덜어주기 위해 티타임을 마련하는 등 세심하게 배려했고, 현장의 예민함이 번지지 않도록 끝까지 차분히 이끌었다. 마지막 촬영 날에는 유종의 미를 기념하는 꽃다발도 한 번 더 안겨 주었다. 자신의 ‘처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려는 정성이, 매 순간 몸소 드러난 사려 깊은 격이었다. 이후에도 감독님은 종종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다.


배우들 역시 끝없이 읊조리던 대사와 장면들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아내며, 또 한 편의 작품을 기억 속 저편으로 떠나보냈다. 한 몸처럼 느끼고 숨 쉬던 역할과도 이제 작별할 시간이다. 함께한 동료들과 더 긴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언제일지 모르는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만남과 이별이 순환하는 곳. 다른 일을 하다 돌아와도, 잠시 쉬었다가 다시 와도, 심장이 뛰어 가장 먼저 달려오게 하는 이곳은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일터’다.


‘처음’은 언제든 다시 찾아온다. 오래 기다렸든, 짧은 간격이었든 늘 비슷한 떨림으로 온 마음을 흔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별을 고하듯 조용히 사라진다. 야속하리만치 미련 없이.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처음’을 기다린다. 그 떨림이야말로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자, 가장 빛나는 진동이다.



tvN 드라마 <산책> 촬영장에서.


이순재 선생님....삶의 배움과 방향을 가르쳐 주시고,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현장에서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이제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존경합니다.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2023. 7.21. 오마이뉴스 <차유진에세이> 게재
2025. 12.1. 글 개정. <브런치>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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