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수> 촬영 때였다. 모처럼 가진 회식 자리에서 감독님이 갑자기 옆자리 여자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개했다.
“사촌누나예요.”
나는 길 가다 사촌 얼굴도 못 알아보는데, 사촌동생을 응원하러 춘천까지 왔다고? 심지어 조금 전, 조문객 역할로 잠깐 출연도 했단다.
“안녕하세요...”
여리디 고운 목소리로 인사한 사촌누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사촌누나’의 이미지였다. 닮은 얼굴에 사촌끼리만 통하는 티키타카식 대화가 그런 인상을 더욱 짙게 했다. 각 잡히지 않은 헐렁한 아우터 차림은 프로페셔널한 커리어우먼보다는 평범한 전업주부에 가까워 보였다.
초면이라 낯가림이 있는지 연신 쑥스러워하셔서 '편하게 말씀하세요~'라고 말하던 순간, 감독님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번에 사촌누나가 우리 영화 대본 수정해 줬어요.”
사촌누나의 반전
‘전업주부 아니셨나요...?’
아, 그건 내 착각이었다.
그런데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무심하면서도 촌철살인 같은 대사들을 이분이 손봤다고? 벌어진 입을 다물자 감독님이 살짝 뒷말을 덧붙였다.
“사촌누나 전공이 교육학이거든요.”
혹시 맞춤법을 봐주신 건가? 이미 초반에 ‘사촌누나표 선입견’을 머릿속에 부어 시멘트도 울고 갈 만큼 단단하게 굳혀버린 터라, 도중에 들어온 새로운 정보가 스며들 틈은 없었다. 중장비 드릴 정도는 돼야 겨우 금이 갈까.
그때, 저절로 균열이 생기게 만든 사촌누나의 한마디.
“저도 사실은… 소설 써요.”
이제는 잠자코 듣기만 할 때가 아니었다. 책을 어디서, 어떻게 쓰셨는지, 단순 취미인지, 블로그 운영자인지, 정식 등단 작가인지... 질문이 머릿속에서 폭주하기 시작했다. 우선 책 제목부터 물었다.
얼굴이 붉어진 사촌누나는 쑥스러운 듯 말했다.
“개 다섯 마리의 밤이요.”
제목이 말해주듯, 개 다섯 마리가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 떠나는 따뜻하고 순수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글은 사람을 닮는다 하지 않았던가. 꼭 읽어보겠다던 약속은 해를 넘기고,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무렵에야 지켜졌다.
첫 장을 펼친 순간, 어퍼컷 한 방
책장을 펼치자 1라운드 종이 울리고, 긴장 없이 다가가던 복서가 어퍼컷 한 방에 쓰러진 듯한 충격이 몰려왔다. 이어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잽처럼, 작가는 선입견으로 자신을 판단하던 독자의 멱살을 붙잡고 롤러코스터처럼 이야기를 몰아쳤다.
... 소설에 개 다섯 마리는 나오지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추운 밤이면 개를 끌어안고 잤대. 더 추우면 두 마리, 세 마리... 아주 추운 밤을 ‘개 다섯 마리의 밤’이라고 불렀대.”
백색증(알비노)을 앓는 아이와 육손을 가진 남자.
소수자이자 약자인 그들은 서로의 고통을 부둥켜안고 의지하며, 개 다섯 마리를 끌어안아도 모자랄 만큼 매서운 혹한 같은 타인의 경멸과 집단 따돌림을 견뎌낸다.
그러나 육손의 남자도 끝내 아이 곁을 지켜주지 못한다. 지독히 외로운 세상에서 알비노 아이가 붙잡은 것은 겨우 12살의 자존심뿐이다. 절박한 몸부림에도, 아이보다 더 나약한 자격지심에 사로잡힌 가해자들은 더욱 집요하고 잔혹하게 아이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
“너무 힘들 땐 엄마, 건너뛰기 버튼을 누르고 싶어.”
아이는 쌓여가는 폭력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작가는 복수도 구원도 없이, 아이가 냉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한다. 처절한 아픔을 타협 없이 정면으로 파고드는 묵직한 서사에 전율이 일었다.
작금의 혐오 사회에서 나는 소외된 약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멸시하진 않았는지, 외면하진 않았는지, 혹은 어설프게 동정하진 않았는지. 쉽게 답할 수 없는 침묵 속에서 쓸쓸한 한숨이 내쉬어졌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옛말, 하나 틀린 게 없었다. 스스로를 편견에 가둔 부끄러움에 책을 덮자마자 꾸벅 절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한 권의 책이 깨뜨린 선입견
며칠 뒤 감독님께 전화를 걸었다.
“<우수> VIP 시사회에 사촌누나, 아니 채영신 작가님도 오시나요?”
“아마 오실걸요?”
그 말을 듣자 소설책과 네임펜이 알아서 가방 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사회 날, 공식 일정을 마치고 뒤풀이 장소로 향했다. 홀 안에 사람이 많아 작가님을 찾기 쉽지 않았다. 그때 감독님이 가리킨 구석진 자리, 그곳에 후광이 비치듯 다소곳이 앉아 있는 작가님이 보였다.
“근데 누나 곧 가실 것 같은데…?”
황급히 감독님 뒤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일어서려는 작가님 앞을 막아서며, 수줍게 빨개진 볼과 음소거된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자... 작가님, 책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저... 저... 사인 좀...!”
작가님은 차분하면서도 우아한 손짓으로 펜을 받아, 책 앞면에 일필휘지로 사인을 남겼다. 그리고 트렌치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홀연히 사라지셨다.
책을 가슴에 품은 문학 팬은 그녀가 떠난 뒷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에 사로잡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작가 소개
채영신 작가. 이화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2010년 실천문학상 신인상(단편 <여보세요>)으로 등단했다.
단편 <4인용 식탁>(2014)으로 ‘젊은 소설’(문학나무)에 선정됐고, 2016년 경기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지원사업 문학 부문에 선정됐다.
장편 <필래요>(2020), 소설집 <소풍>(2020), 제7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개 다섯 마리의 밤>(2021) 등을 집필했다.
2023. 2. 28. 오마이뉴스 <배우 차유진 에세이> 게재
2025. 8. 9. 글 개정. <브런치>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