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년 전 일이다.
운동 삼아 걷기 좋은 동네 개천길이 있다. 해질 무렵, 매일 같은 시간에 나가면 어제도 본 사람들과 산책하는 반려견들이 마주친다. 굳이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비슷한 옷차림 덕에 점차 낯익어지던 중, 매일 보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세차게 할아버지를 추월하는 사람들 사이로 아장아장 느린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닮았다. 특히 바닥을 끄는 검정구두에 시선이 자꾸 머물렀다. 지난번 벤치에 앉아 쉬실 때 말을 걸까 고민했지만, 결국 돌아섰다. 그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려, 다음에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않기로 다짐했다.
아버지를 닮은 할아버지
먼발치에서 힘겹게 벤치에 앉으시는 할아버지가 보이자, 부리나케 달려가 눈높이를 맞춰 앉아 준비한 말을 꺼냈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할아버지는 미소로 인사했다.
"얼마 전부터 오가며 자주 뵈었어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거운 구두로 오래 걸으시면 건강에 좋지 않아요. 특히 더운 여름엔 운동화를 신어야 해요."
"구두밖에 없어. 이거라도 신고 다녀야지."
"괜찮으시면 운동화 한 켤레 선물해 드려도 될까요?"
"좋지요."
할아버지는 크게 반색했다.
"발 치수가 어떻게 되세요?"
"잘... 몰라."
"잠깐 구두 좀 살펴봐도 될까요?"
구두를 조심스레 벗기자, 발바닥 모양 그대로 닳아 파인 밑창이 드러났다. 희미하게 새겨진 치수 ‘265’를 어렵게 확인한 뒤 물었다.
"아버님, 운동화는 집으로 보내드릴게요. 주소가 어떻게 되세요?"
"주소가... 잘 생각이 안 나네."
할아버지는 셔츠 왼쪽 가슴 포켓에서 천천히 꺼낸 목걸이 명찰을 보여주었다.
병명 : 노인성 치매환자
성명 : 000
- 길을 잃었을 시, 아래로 연락바람 -
비상 연락망 : 핸드폰 번호
(010 - 000 - 0000 외 3개 번호)
"아버님, 운동화 산 뒤에 직접 전화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네, 또 뵙겠습니다."
집에 와서 사진으로 찍어둔 연락처를 확인해 보니 자녀분들의 번호였다. 가족에게 실례를 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운동화를 사고, 아버님을 만날 때까지 개천길을 계속 걸어야겠다. 3~4일 안에는 뵐 수 있겠지. 그나저나, 나를 기억해 주실까...?'
다음 날, 발볼 넓고 가벼운 운동화를 매장에서 직접 구입한 뒤,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그곳으로 갔다. 개천길을 걷고 주위를 살피다 보니 어느새 2시간이 흘렀다. 개천길 끝까지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중, 멀리 홀로 벤치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평소와 달리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검정 구두도 물끄러미 내려다보셨다. 해진 밑창을 살피는 모습으로 보아, 어제 일을 기억하고 계신 듯했다.
"아버님~!"
부르며 달려가자, 두 팔을 흔들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운동화를 보여드리기 전부터 연신 고맙다고 하셨다. 구두를 벗겨 운동화로 갈아 신기고 끈도 매어드렸다. 신발은 다행히 꼭 맞았다. 할아버지는 손바닥으로 빈 옆자리를 두드리며 잠시 앉으라 하셨다.
말씀대로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운동화를 함께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다시 내게 몸을 돌려 고마움을 전했다.
"아니요, 제가 마음이 편해져 더 좋습니다.
건강하세요, 아버님."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간 개천길에 가지 않았다. 쑥스러움과 동시에 운동화 신은 모습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주일쯤 뒤 다시 만난 할아버지는, 내가 선물한 운동화 대신 무거운 검정구두를 신고 여전히 바닥을 끌며 걷고 계셨다.
그날 이후로 오랫동안 개천길에 가지 않았다. 줬으면 그만인 것을, 실망이나 섭섭함 같은 마음을 키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냥 아는 척할 걸
시간이 흘러 반려견을 입양하고 1년 만에 다시 개천길을 걸었다. 매일 할아버지가 앉던 벤치를 수없이 지나쳤지만, 사계절이 두 번 지나도록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이제야 후회가 된다. 그날 다시 구두 신은 할아버지를 보았을 때, 피하지 말고 잔소리라도 하며 한번 더 다가가 볼걸. 그랬다면 이후에도 계속 뵐 수 있었을 텐데. 서서히 나를 잊으실 때까지. 쿨한 게 아니라 소심했던 나로 인해 소중한 추억을 더 쌓지 못했다.
운동화든 검정 구두든,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환히 웃어주시던 할아버지. 다시 뵙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 그가 머물던 개천길을 어김없이 서성인다.
할아버지 검정구두. 새로 신겨드린 운동화.
2023. 2. 28. 오마이뉴스 <배우 차유진 에세이> 게재
2025. 8. 10. 글 개정. <브런치>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