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일이 뜸하다. 덕분에 글 쓸 시간은 넉넉하지만, 결코 마음 편할 리 없다. 때로는 잠을 설칠 정도로 불안하고, 밑도 끝도 없는 자기 최면을 되뇐다.
'결국엔 잘 될 거야...!'
버티는 자들의 겨울 이야기
일이 없을 때는 스스로 루틴을 만들어 일상의 동력을 유지한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글을 쓰고, 반려견과 아침 산책을 하며 영어 수업을 청강한다. 오전엔 집을 청소하고 피아노 레슨을 받으며, 오후에는 다시 피아노 연습에 매진한다. 저녁 산책 후에는 독서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자칫 백수가 과로사할 판이다. 무엇보다 늙으신 어머니 곁에서 쌓여가는 염치의 빚이 무겁다.
우리 직업은, 마치 하늘에서 선물 보따리가 떨어지듯 ‘선택’ 받는 일이다. 일이 없으면 ‘더 치열하지 못해서, 특별하지 못해서’라는 자책에 스스로를 동굴 속에 가둔다.
체홉의 <바냐 삼촌> 속 “일을 해야 해요!”라는 대사가 귓가를 스치면, 그나마 움직이던 루틴도 멈춘다. 시장 상황을 파악하러 집을 나서자, 칼바람에 살이 베이듯 녹록지 않은 현실이 온몸을 시리게 한다.
드라마 제작 편수는 예년의 절반으로 줄었고, 내년엔 더 축소될 전망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기획 단계에서 무산되는 일이 잦다. 지천명을 넘긴 지금, 현실적인 고민도 커져만 간다.
'계속 버틸 것인가, 아니면 멈출 것인가.'
만나는 지인들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다. 차가운 현실 조언과 따뜻한 위로. 전자는 객관적인 비교와 분석으로 나를 냉정하게 비춘다. 다소 허세가 느껴져도,
성공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이유 있는 자신감이다.
상처 같은 말 뒤엔 어김없이 ‘잘 될 거야’라는 연고 같은 말이 덧붙는다. 그러나 그들 앞에서 진심을 다해 열심히 살아온 내 삶은 보잘것없게만 느껴진다.
다시 몇몇 지인을 만나본다. 이들 역시 얼어붙은 K-드라마 왕국에서 온몸으로 혹독한 겨울을 버티는 현역들이다. 아이 둘을 둔 동갑내기 배우는 일이 없어 심적 고통이 적지 않지만, 오히려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한다.
따뜻한 위로의 치명적인 단점은, 듣는 순간 잔뜩 얼어 있던 마음에 장작불이 지펴져 또다시 냉혹한 현실을 잊게 만든다는 것이다.
방송국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한 분장 선생님은 퇴사 후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그러나 주변의 텃세로 몸과 마음이 크게 지친 데다, 일마저 줄어 기댈 곳 또한 없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며 여전히 현장을 그리워한다. 아이 같은 초심의 미소에 덩달아 웃게 된다.
20년간 굵직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캐스팅 디렉터님도 최근 폐업을 고민할 만큼 현 상황의 심각함을 토로했다. 책임져야 할 이들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사무실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이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함께 작업했던 드라마 감독님도 장기간 이어온 프로젝트가 답보 상태에 갇힌 채 힘든 시간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다시 현장에서 “레디, 액션!”을 외칠 날을 갈망하며, 꼭 살아남자고 작은 파이팅을 건넨다.
버텨낸 시간, 피어날 봄을 기다리며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왔음을 또렷이 기억한다. 밤낮 없는 강행군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아파도 일터를 떠나지 않았다. NG가 날까 숨소리마저 현장에 바쳤다. 모두가 단 한순간도 나태하지 않았다. 험난한 시련을 짊어진 와중에도 정성을 담아 격려를 건네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당신이 지금까지 버틴 건, 잘해왔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 <오마이뉴스>에 글을 송고할 때마다 제일 먼저 도착하는 유지영 기자님의 '글이 좋아요!'란 문자는 긴장했던 마음을 풀어주고 막힌 속이 뻥 뚫리게 한다. 묘한 기분에 뜻하지 않은 울컥한 위로도 받는다.
물론 그 말을 다 믿진 않는다. 하루에도 수없이 훌륭한 글들을 접할 텐데 과연 내 글이 그럴까. 그럼에도 오직 예쁜 말만 건넨다. 따로 조언은 없다.
남은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 생각하고 쓴 글이 칭찬을 받으니,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이 부푼다. 독자들의 소감과 공감을 나눌 때 기쁨은 배가 된다.
나는 ‘인정’을 받아서 기쁜 것이다. 나의 가치를 알아주기를. 물질적 보상도, 사회적 지위도 아닌, 성심껏 일궈낸 과정을 스스로의 긍지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 오직 그뿐. 우리 모두 여느 때보다 인정에 목말라 있다.
지금은 차가운 조언보다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시기다. 부디 예쁜 말만 나누자. 듣는 순간 상대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마음을 울컥하게 해 저절로 미소가 번지게 하자.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잠깐 내려놓을 수 있도록, 떠오르는 대로 전부 들려주자. 당신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지. 말이 서툴다면 그저 잘 들어주기만 하자.
새벽에 친언니로부터 낯선 장문의 문자를 받았다. 그리고 맨 마지막 문장.
"가족의 응원이 힘이 되었다는 모 배우의 말에, 나도 지금부터 너를 미친 듯이 응원하마. 곧 온다."
나는 기다린다. 모두가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고 따스한 봄을 맞을 때, 단단히 쌓아 올린 내공이 빛을 발할 순간을. ‘진짜가 나타났다!’며 환호할 그날을. 그리고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 모두 이 겨울을 무너지지 않고 버텨낸 이름이 되기를.
2023. 6. 29. 오마이뉴스 <배우 차유진 에세이> 게재
2025. 8. 11. 글 개정. <브런치>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