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쫓는 동행, 배우와 변호사

by 차유진


판사가 휴정을 선언하자 복도로 방청객이 쏟아져 나왔다. 그 속에는 피고인의 가족도 있었다. 담당 변호사를 둘러싸고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눈빛을 모았지만, 멀리서 보아도 상황은 녹록지 않아 보였다.



가족들의 마음은 무거운 바위에 짓눌린 듯 깊이 내려앉았다. 피고인의 어머니는 형량을 단 1년이라도 줄이고 싶다며 항소 의지를 밝혔다. 죄가 아무리 무겁더라도 자식을 포기하는 어미는 없다.



다른 공판들도 잇따라 방청했다. 중범죄에 연루된 피고인들이 덤덤한 표정으로 판결문을 들었다. 잠시 후 판사가 판결을 마무리하고 2심 재판 일정을 알리자, 피고인은 보호경찰에 인도되어 법정을 빠져나갔다.


타인을 대신 살아내다.

드라마 속 법조인 역할 자문을 위해 변호사 사무실을 찾은 적이 있었다. 소개받은 변호사와 함께 낯선 법원을 둘러보며, 무겁고도 엄중한 공기와 하루에도 몇 번씩 희비가 엇갈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직접 눈에 담았다.



배우와 변호사. 얼핏 보면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극 중 인물을 마주할 때마다 의뢰인을 대하는 변호사와 닮았다고 느끼곤 했다. 둘 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변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수많은 의뢰인을 만나듯, 배우도 다양한 인물을 극 속에서 만난다. 변호사는 사건을 맡자마자 정황을 꼼꼼히 분석하고 무죄 입증에 필요한 단서를 찾는다. 배우 역시 맡은 역할의 상황을 먼저 파악한 뒤, 그 이면의 서사를 살핀다.



배우는 인물의 타당성이 확보됐다고 느끼는 순간 세부 준비에 돌입한다. 말투에서 분장, 의상, 소품에 이르기까지 인물과 하나 되기 위한 수고로운 과정을 밟는다.


변호사 역시 판결 확정 전까지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의뢰인을 지킨다. 상대가 무너질 틈을 찾기 위해 수많은 변수를 가정하고, 승소로 이어질 퍼즐 조각을 하나씩 맞춰 나간다.



그렇다면 변호사는 승소를 위해, 배우는 역할의 완성을 위해 무엇으로 판사와 관객의 동의를 얻을까. 답은 하나, 진실이다. 아니, 그 진실에 닿으려는 노력이다.


변호사들은 입을 모았다.



진실의 실체는 없습니다.”



의뢰인들은 진실을 숨기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다. 기억은 언제든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변호사는 의뢰인의 편에 서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최소한의 형량을 이끌어내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배우도 다르지 않다. 대본 속 인물은 침묵한다. 진실은 배우 스스로 찾아야 한다. 편견을 벗고 마음을 열어야만, 비로소 그 인물을 온전히 품고 사랑할 수 있다.


배우, 변호사로서의 '쓰임'

항상 대중의 찬사도, 재판의 승리도 보장되지 않는다. 고민과 좌절, 한계가 겹쳐 때론 이 일이 내 길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까지 밀려온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한 변호사의 말이다.



"처음 맡은 의뢰였는데 99% 지는 소송이었어요. 그런데 1% 가능성을 붙잡고 끝까지 노력했더니 결국 이겼습니다. 그 성취감을 느껴본 뒤로는 이 일을 포기할 수 없게 됐어요.”



배우도 마찬가지다. 단 1초라도 ‘진짜의 순간’을 만났을 때의 희열은 잊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은 끝없는 시행착오를 묵묵히 견딘 뒤에야, 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찾아온다.



부디 맡은 역할에 이 한 몸 잘 쓰이길. 그로써 많은 사람을 설득하고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변호사로서도 배우로서도 ‘쓰임’을 다한 셈이다. 뿌듯한 보람을 안고 다음 여정으로 나아가면 그뿐이다.



곁에는 주어진 일에 진심으로 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눈앞이 아득하기만 한 건 아니다.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그들이 밟아간 길을 지표로 삼아 걷다 보면, 언젠가 이 길의 끝에 바르게 다다르지 않을까.



방화 혐의로 1심 선고를 받는 피고인. 방청석에 나란히 앉은 변호사와 배우는 미동 없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진실은 무엇인가. 아니, 진실에 가까운 것은 무엇인가. 마침내 중형이 선고되고 피고인은 법정을 떠났다.



이윽고 변호사는 의뢰인을 만나러 서류가방을 움켜쥐고 일어섰다. 배우도 법원 체험을 마치고 서둘러 짐을 챙겼다. 두 사람은 서로의 건투를 빌며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일터로 향했다.


그리고 진실에 한 뼘 더 가까워지기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던진다.



다른 듯 닮은 변호사와 배우의 일터.




2024. 10. 23. 오마이뉴스 <배우 차유진 에세이> 게재
2025. 8. 14. 글 개정. <브런치>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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