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명을 앞두고 연말증후군이 찾아온 걸까.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앞날에 대한 극심한 불안과 이루지 못한 성취에 대한 자책이 밀려와 며칠째 잠을 설쳤다.
폭넓지 못한 인간관계 속에서 여전히 미숙한 자신을 탓했고, 쌓여만 가는 하루 속에서 일렁이던 근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인가!’라는 입에 풀칠도 못할 사유는 집어치우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희망 없는 답안을 받아 든 심정이랄까. 그러던 중 지난 설, 두 편의 TV 프로그램을 만나게 됐다.
[송골매 콘서트] 내게도 저런 벗이 있다면
설날 연휴에 방송된 송골매 콘서트를 본방사수한 오빠와 형부는 50대 중반의 고민을 잠시 내려놓고, 70대 구창모와 배철수의 멋진 나이 듦에 감탄했다. 구창모의 여전한 미성과 배철수의 날씬한 체구, 숱 많은 흰머리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다음 날까지도 감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팬심을 보자, 재방송 시간까지 예약해 놓고 기다렸다.
사운드를 제대로 즐기려 볼륨을 높이는 순간, 배철수와 구창모가 무대에 등장했다. 오프닝곡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전주가 일렉트릭 기타로 짜릿하게 튕겨지자, 송골매가 긴 잠에서 깨어난 듯 큰 날갯짓으로 드높이 비상했다. 객석의 함성은 물론, TV 밖에서도 심장이 뛰었다.
이 음악에 울컥하면 나이대가 바로 드러난다던데, 두 줄기 눈물까지 주르륵 흘러내리니 민증번호까지 공개된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중학생이던 오빠 덕에 들었던 노래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따라 부르니, 그들이 메가 히트곡을 다수 보유한 시대의 아이콘이었음이 분명했다.
배철수는 송골매 해체 이후 라디오 DJ로 30년간 안정적인 자리를 지켜왔고, 구창모 또한 오랜 사업과 저작권 수입 덕분에 노후 걱정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던 중에도 보는 내내 밀려오는 감동은 ‘저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한 동료이자 친구가 나에게도 있을까.’ 하는 부러움이었다.
팀 안에서 함께 고락을 겪을 때는 서로의 재능에 동경과 시샘이 뒤섞였을 테고, 각자의 길로 나설 때는 서운함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를 존중하고 응원했기에 굽이진 세월길을 나란히 걸으며, 결국 진정한 벗을 얻을 수 있었다. 나도 70이 넘어 그런 벗 하나 곁에 둘 수 있기를...!
[다큐, 어른 김장하] 어른답게 늙는다는 것
고민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1월 초, 20년 만에 연기 스승님을 무작정 찾아뵈었다. 그분이 도움 될 것이라며 추천해 주신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경남 MBC에서 제작해 유튜브에서 입소문을 타고, 설날 연휴에는 전국 방송으로까지 편성된 작품이다. 18세에 한약사가 되어 60년간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하며 지역사회에 꾸준히 거액을 기부한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다.
진행 방식이 꽤 독특했다. 주인공 김장하 선생은 단 한 번도 카메라 정면에 앉지 않는다. 대신 그를 취재한 기자가 인터뷰이 자리에 앉는다. 보통 기자는 뒤통수만 보이는 오버숄더 샷으로 처리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오히려 기자가 전면에 나섰다.
칭찬이 유도되는 질문엔 말문을 닫고, 스스로를 드러내길 극도로 꺼리는 김장하 선생을 전면에 세우긴 어려웠던 것이다. 대신 취재 기자와 주변인들이 빈자리를 채웠는데 처음엔 구성이 매끄러울지 걱정했지만, 보다 보니 2부작으론 어림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 사람을 취재하다 보면 또 다른 미담과 수혜자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그들의 증언에서 전해지는 김장하 선생의 크고 작은 선행 일화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울림으로 다가와, 한동안 말을 잃은 채로 멍하니 앉아 있게 했다.
한약방에 찾아온 아픈 이들의 돈을 허투루 쓸 수 없다며, 생색 없이 수많은 후원금으로 되돌려주었다. 줬으면 그만이라며. 잠시 마스크를 벗은 어르신의 평온한 얼굴과 소년 같은 눈빛에서 우러나오는 온화한 인품이 화면 너머로 향기처럼 전해져 왔다.
“산에 오를 때는 사부작사부작, 꼼지락꼼지락 그렇게 걸어가면 된다.”
방송 끝무렵에 김장하 선생이 한 말이었다. 혹시 화면에 비친 젊은 여자 PD가 나와 같은 고민을 품고 선생께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물었던 걸까? 선생의 대답에 PD는 웃으며 “그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고, 선생도 웃으며 “그럼 된 거다.”라고 하셨다.
닮고 싶어도, 너무 자책하진 말자
삶의 이력을 깊이 새긴 스승님은 다큐를 보고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겠다고 하셨다.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안은 어머니도 방송을 본 뒤, 밥상 앞에서 편히 밥 먹는 게 부끄럽다며 자책하셨다. “그럴 필요 있겠냐, 김장하 선생과 엄마는 다르다.”는 말에도 고개를 세차게 저으셨다.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 중년을 훌쩍 넘기고 삶을 조금씩 정리할 나이가 되어도,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앞날에 대한 막막한 고민을 거듭한다. 그리고 결국 또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선다.
송골매처럼 멋들어지게, 김장하 선생처럼 어른답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들. 좋은 친구 하나 곁에 두고, 능력껏 베풀며 사는 것이 어른으로 익어가는 길임을 알면서도, 나는 아직 삶에 대한 심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안달하고 있다.
어디로 어떻게 비행할지는 알 수 없다. 나보다 훌륭한 누군가를 마주하더라도 닮으래야 닮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너무 자책하지 말자. 우리는 지금까지도 충분히 잘해왔다. 앞으로도 사부작사부작 그렇게 걸어가면 된다.
<송골매 콘서트>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2023. 1. 31. 오마이뉴스 <배우 차유진 에세이> 게재
2025. 8. 15. 글 개정. <브런치>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