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읽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창고 Sep 05. 2016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1

살다 보면 장례식장에 가야 할 일이 종종 생깁니다. 내 일가친척의 상을 당해서 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아는 사람, 또는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장례식장에 가는 경우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의 장례식장은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일단 장례식장에 도착하면 빈소에 들어가기 전에 조의금을 전달하고, 다녀갔음을 알리기 위해 방명록에 기록을 남깁니다.(피치 못할 사정으로 참석을 하지 못한 이들의 조의금을 전달하고 그들의 이름을 남기는 것도 중요한 절차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바로 옆에 위치한 식당(?)에 가서 같이 온 이들과 자리를 잡던지 아니면 먼저 온 아는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한 후 따끈한 국물(대개 육개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합니다. 대부분 고인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그냥 세상사는, 말 그대로 살아남은 이들의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고인이 되어서 갔다기보다는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또는 그의 친족을 조문하기 위해서 가는 경우가 더 많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장례식장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회합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결혼식은 대신 축의금만 전달해도 장례식은 웬만하면 참석하는 우리나라의 문화인지라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 간에 반갑게 악수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수 있습니다. 또, 유명 정치인들이 상을 당하면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진을 치고 있다가 기사거리가 될만한 사람이 오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무언가 흘려주기를 바라고 계속 취재를 하기도 하지요. 우리나라 장례식장의 대략적인 문화, 여기서 크게 어긋나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장례식은 그저 거들뿐'이 아닐까요?


#2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마음과 행동의 변화, 그리고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주변 사람들의 자세를 아주 섬세하면서도 리얼하게 그려 놓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예나 지금이나 망(忘) 자를 보내는 생(生) 자들의 자세가 그다지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에 모인 사람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이 가져올 자신과 지인들의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관한 거였다.


그녀는 남편이 사망한 경우 국가로부터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다 파악하고 있었으며, 다만 조금이라도 더 받을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을 뿐이었다.


'죽음이라, 그래 죽음이란 말이지. 그런데도 저들은 모르고 누구 하나 알려고 하지도 않고 나를 딱하게 여기지도 않는구나. 그저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어.(문 저쪽 멀리에서 사람들의 노랫소리와 반주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고위 법관이었던 이반 일리치가 죽자 사람들은 그의 자리를 누가 이어받고 그로 인해 어떤 인사이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그것이 나에게 어떤 긍정적인 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더 첨예한 관심을 보입니다. 그의 아내도 궁극적으로 살아 있는 가족들이 어떻게 하면 현실을 더 잘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에 만 더욱 신경을 쓸 뿐입니다. 죽은 이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이 삶을 유지시켜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이들 모두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고 또 그럴 의무와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도 굉장히 힘든 일일 것입니다. 다들 많이 피곤하고 지치겠지요, 특히 지근거리에서 바라봐야 하는 가족들의 경우에는 더욱이 말이지요. 또한 죽어 가는 이도 주변 사람들이 마냥 슬퍼하고 같이 힘들어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3

지금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양비론이나 또는 어쩔 수 없잖아라는 옹호론이 아닙니다. 조금 범위를 좁혀서 '장례식'에만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장례식에서 할 일이 무엇일까요? 가신 이를 기리고 남은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 본질에 집중하면 장례식이 조금 더 품위 있어지지 않을까요? 길면 한 시간, 짧으면 30분 정도 자리에 앉아 있게 될 텐데요, 지인의 일가라 잘 모르는 분이었다면 그 지인을 위로하면서 그/그녀에게 어떤 분이었는 지를 정중히 묻고 위로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반갑게 악수하고 서로의 안부를 큰 소리로 묻는, 친교의 장소로서의 장례식장은 그만 가고 싶다고 한다면, 너무 앞서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일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평] 염력 - 연상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