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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다

[서평] 공터에서 - 김훈

by 생각창고

*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훈의 팬이라면, 그래서 마음을 열고 읽는다면 감동과 카타르시스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면, 작품의 밀도나 구성 측면에서 탁월한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1910년 한일합방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긴 기간을 배경으로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심심합니다.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주인공 아버지와 그의 동지의 상해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한 부분과 미크로네시아라는, 조금은 생소한 지역을 주요 공간적인 배경으로 삼아서 끈기 있게 이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읽어 보시라고 강력하게 추천하기에는 아쉬움이 좀 있습니다. 구성과 이야기 전개가 짜임새가 있다거나 탄탄하다거나 그런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 읽은 후에.


다만, 그의 문장력은 명불허전, 이 부분에 있어서 현시대에 김훈을 능가할 작가를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비장함과 건조함, 그리고 무거운 현실 묘사는 읽는 이를 지치게 만들기도 합니다만 독자를 지치게 만든다는 것은 달리 이야기하면 독자를 압도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압도하는 문장력은, 대단합니다. (그의 장점이 극대화되는 장르는 개인적인 생각에 소설보다는 에시이, 산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적이면서도 유려한 화법과 문장은, 산문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1 김훈의 대하소설이네요.


마동수/마장세/마차세, 이 세 부자가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 이 작품의 중심 내용입니다. 다루는 시간의 길이를 고려하면, 그렇게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 얽히고설켜서 복잡하게 꼬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용은 단순합니다. 그래서 읽기가 어렵다거나 분량과 등장인물의 홍수에 압도당한다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조금은 심심하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마동수/이도순 부부의 삶을 통해서는 일제시대부터 6/25를 거치는 고통스러운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6/25 때 부산에서 피난살이하던 시절에, 잿물로 피 묻은 군복을 빨아서 생계를 유지하다가 만나서 이들은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아들인 마장세와 마차세의 삶을 통해서는 그 이후 시대의 삶의 팍팍함과 고단함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삼부자 및 이들과 연관 있는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 대부분이 흙수저 내지 무수저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이 더욱 현실적으로 무겁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김훈이 쓴 대하소설 격이네요, 이렇게 긴 기간을 관통하는 작품을 그가 남긴 적이 있나 싶습니다. 사실적인 우울함이 작품 안에 가득합니다.


마장세는 베트남 전쟁 참전 후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베트남을 거쳐 미크로네시아에 터를 잡고 고철 무역 등 사업을 하면서 삶을 영위합니다. 그러다가 동생 마차세의 군대 선임인 오장춘과 연이 닿아서 더 크게 한국을 오가며, 한국을 상대로 고철 무역을 키워 가다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 감옥까지 가게 됩니다. 동생인 마차세는 한국에서 어렵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다가, 그의 군대 선임이자 형의 사업 파트너인 오장춘 때문에 어려움에 놓이게 되지만 비교적 조용히, 평범하게 자기의 삶을 꾸려 갑니다. 오장춘은 마장세와 같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물건을 다루다가(마약) 결국 쫓기는 몸이 되고, 그가 군생활을 했던 강원도 부대 인근의 여관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2 제목인 '공터에서'를 보며, 궁금했습니다. - '공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어린 시절 제가 살던 동네에 제법 넓은 공터가 하나 있었습니다. 온 동네 아이들이 그곳에서 뛰어놀았고(터 가운데에 굉장히 크고 오래된 팽나무도 한 그루 서 있었고요)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 같은 구실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사람 발길이 끊이지 않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곳을 생각하면 포근하고 즐거운 이미지보다는, 쓸쓸하고 적막한 모습이 더 강하게 그려집니다. 이유는 누구나 드나들고, 누구에게나 개방된 곳이었지만 저녁이 되면 텅 비는, 쓸쓸하고 조금은 무서운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으나 그중 누구의 것도 아니었으며 어느 누구도 거기에 둥지를 틀고 살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 형은 왜 여기서 살아?

- 야, 그런 건 묻지 마. 난 한국이 무섭고 힘들어. 넌 왜 거기서 사니?

마차세는 대답하지 못했다.


주인공인 마차세가 형(마장세)에게 묻습니다. 형은 왜 여기(미크로네시아) 사냐고. 형은 한국이 무섭고 살기 힘들어서 이곳에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업상 접대할 일이 생기는 경우에만 한국에 나오고, 절대로 집에 들르지 않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장례식조차도 참석하지 않고, 동생의 결혼식에도, 결혼해서 현지인인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참석합니다. 하지만 마차세 역시도, 그리고 이어지는 형의 반문에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마장세에게는 한국이 '공터'였습니다. 거쳐 갈 수는 있으나 정착하여 살 수 없고, 무섭고 부담스러운 곳. 마차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 몸을 담고 살고는 있으나, 자기 터전이라고 확신하지 못하고 그냥 거쳐가듯이 살 수밖에 없는, 정착하여 살기 힘든, 공터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3 '문장은 김훈'


일제 시대에 '문장은 (이)태준, 시는 (정)지용'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절반만 흉내 내서 표현해 본다면 '문장은 김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훈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문장은 건조하고 단문이면서 어두운데, 그렇지만 화려하면서 빈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름답습니다. 문학 평론가 김윤식의 평대로 '감성을 거부하는 강도 높은 문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문장력은 작품 속 캐릭터에 독특한 특징을 부여합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덤덤하면서도 건조한 삶을 살고,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무언가 심오합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주인공격인 마차세에게서는 까뮈의 작품 '이방인'의 주인공인 뮈르소의 향기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본인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관찰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느낌을 줄 정도로 담담한 삶의 태도를 보이는 것 말입니다. '문체가 인격이다'하는 말도 있습니다만, 작가가 해당 캐릭터로 하여금 구사하게 하는 문체가 결국 그 캐릭터에 해당 인격을 부여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인상 깊은 구절을 몇 문장 베껴 봅니다 :


- 경찰관들이 야근하는 날이면 신음소리는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들렸다.


- 이도순은 아들을 쳐다보았다. 눈동자에 시선의 방향이 없었다. 마차세는 어머니의 눈이 지나간 시간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차세는 어머니의 눈을 피했다.


- 사람들은 난을 피하려고 피난지로 몰려왔지만 세상의 모든 환란은 피난지로 몰려들었다.


- 몸속의 어두운 바다에 새벽의 첫 빛이 번지는 것처럼 단전 아래에서 먼 동이 텄다. ... 임신은 몸의 새벽을 열었다.


김훈은 긴 문장과 긴 이야기에 대한 혐오감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언제나 단문을 구사하고 간결하게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이런 그의 작품을 쓰는 자세는 작가의 말 중에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수다를 떨지 말아야 한다고 늘 다짐한답니다, 이 단문 주의자께서요. 원래 5권 정도로 이 작품을, 길게 쓰고 싶었다고 이야기한 언론 인터뷰를 읽었는데요, 기력이 미치지 못해서가 아니라 '수다를 떨기 싫어서' 한 권으로 끝낸 것은 아닌가 합니다 : 더 길게 쓰고 싶었지만, 기력이 미치지 못했다. 수다를 떨지 말아야 한다고 늘 다짐하고 있다. 쉬운 일은 아니다.(작가 후기 중에서)


김훈의 작품은 읽다 보면 신문 사회면을 계속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의 전작인, 아래에서 잠시 소개할 '공무도하'는 읽다 보면 몇 백 페이지의 신문 사회면을 연속으로 읽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듭니다) 사실에 기반한 철저한 묘사와 서술을 시종일관 지속하기 때문입니다. 독자의 감성을 터치하려 노력하기보다는 사실 및 현실적인 묘사를 통해 독자 스스로가 깨우치기를 바라며 계속 직구를 던지는, 그런 작가입니다. 신문기자요 저널리스트로 살았던 시절의 습관이 글에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가 쓴, 근현대사를 기반으로 한 대하소설이라,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그의 소설 안에는 로고스는 가득합니다만 파토스는 상대적으로 조금 부족해 보입니다.


#4 고철 이야기


마장세는 고철 무역을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입니다. 동생인 마차세와 그의 군대 선임이었던 오장춘과의 인연도 이를 기반으로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중고차를 팔고 그 중고차가 고철이 되면 고철로 또 팔아먹는, 그런 사업이지요. 그는 베트남 전쟁 참전 후에 귀국하지 않고 미크로네시아에 정착하면서 이것을 업으로 선택합니다. 그의 전작인 '공무도하'에서도 주요 공간적 배경이 되는 군산의 '해망'은 미군의 폭격 연습장으로 이 지역 바닷속에 있는 폭격 잔해물들을 건져내서 고철로 파는 것을 업으로 사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또한 이 작품에는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후에'라는 지역도 등장하는데 이 지역 주민들도 미국과의 베트남 전쟁의 흔적인 탄두, 탄피 등을 주워서 고철로 팔아 생계를 유지합니다. 이래저래 고철이 소재로 종종 등장하네요, 김훈의 소설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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