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이라고 하는데 통상적인 소설로 읽기에는 애로사항이 많은 작품입니다.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 정신이 돋보이는 책입니다만, 궁극적으로는 작가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은 방식으로 그냥 힘 잔뜩 주고 쓴건 아닌가 합니다.
# 너의 정체는 무엇이냐!!!
소설도 아닌 것이, 에세이도 아닌 것이, 시도 아닌 것이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있습니다. 장르의 경계 위에 서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러고 싶은 것인지가 잘 구별이 안 갑니다. 소설이라고 저자는 '주장'하지만 소설로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구성'과 '캐릭터'라는 소설의 필수 요소가 저의 눈에는 안 보이고 안 읽히기 때문입니다. 실험정신을 발현해서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은 방식으로 썼습니다.
이 작품 안에는 시, 에세이, 소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로 등단한 문인답게 작가는 시적 감수성 및 섬세한 감정 표현이 가득한, 묵직한 문장으로 책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들도 꽤 많이 삽입되어 있습니다만 이야기를 전달하는데는 별 도움이 안 된 것 같습니다. '흼(whiteness)'을 표현하려고 나름 애는 쓴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희미하기만'(vague) 합니다. 힘을 잔뜩 주고 찍고, 힘들게 편집해서 실었는데 이야기에 별로 도움이 안 되어 보입니다.
# 문장들
새로 빨아 바싹 말린 흰 베갯잇과 이불보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거기 그녀의 맨살이 닿을 때, 순면의 흰 천이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모래
그리고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부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