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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창고 Sep 04. 2017

[영화평] 아토믹 블런드 - 데이빗 레이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액션 영화입니다만, 어느 정도는 예측이 가능한 이야기의 전개가 흠이라면 흠입니다. 샤를리즈 테론의 연기는 명불허전, '여배우를 주연으로 해도 멋진 액션 영화가 가능해'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것 같습니다.

미국식 영웅주의와 문화적인 열등감도 일정 부분 보이고요.


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재미있는 액션 영화 한 편 보겠다는 분들께는 추천합니다. 재미있게 잘 만든 영화입니다.


일단, 칭찬부터.

샤를리즈 테론의 연기, 특히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 연기는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좀 뜬금없습니다만, '남자랑 여자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라는 질문에 '쌈 더 잘하는 사람이 이겨'라고 응답하는 액션신을 시종일관 보여 줍니다. 그간 할리우드 여전사님들이 보여준 액션이 부드럽고 우아한, 화면 잘 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절제되고 다듬어진 그것이었다면, 테론 님은 날 것 그대로, 살아 있는 격투기 액션을 보여 줍니다. 굉장히 거칠고 힘든 촬영이었을 것이고, 아마 부상도 많이 당했겠지요. 말 그대로 열연이고 열심히, 인상적으로, 잘 연기했습니다.


샤를리즈 테론은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갈 힘이 있는 배우입니다. 특히 시종일관 보여주는 싸늘한 눈빛 연기는 등장인물 전체를 압도하고 전체 분위기를 지배하는데요, 그녀 말고 다른 적임자를 찾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샤를리즈 테론은 1975년생, 우리 나이로 43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야 주목을 받고 그 연기력 및 내공을 더욱 인정받는 것 같습니다(최근 매드 맥스의 영향이 아무래도 크겠지요). 이탈리안 잡(2003년)에서 조연이라는 위치와 캐릭터상 한계에 부딪쳐 본인의 매력을 더욱 발산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매드 맥스와 아토믹 블런드에서 마음껏 에너지를 발산하며 다 푸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시간과 그간의 작품들이 그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준 것 같기도 합니다, 때가 무르익어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도록. 좋은, 훌륭한 배우이고요, 앞으로도 보여줄 것이 많은 것 같아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눈빛이 장난이 아닙니다.
이건 뭐 섬뜩하고 무섭기까지 하네요.

반면에 조금 아쉬운 부분은 소피아 부텔라의 활용입니다. 조금 더 강렬하게 사용 가능한 배우요 캐릭터인데 사용하다가 만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쉽네요. 제임스 맥커보이는 딱 그 비중만큼 연기합니다. 그 불량함과 간교함과 잔인함, 인상적입니다.


이 영화를 여성 주연의 007 영화라고 소개한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일정 부분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다니엘 크레이그가 콘셉트를 바꿔놓은, 돌쇠형/액션형 007의 여성 버전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의 성취는 분명합니다. 할리우드에서 주인공 잘 선택해서 만든, 여성 주인공의 돌쇠형 007.


미국 스파이 영화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본 시리즈 말고는 개성 있는 작품들이 딱히 생각나지 않더군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1996년에 시작되었으니 재미있고 개성 넘치는 스파이 시리즈의 역사가, 개인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할리우드는 그리 긴 편이 아닙니다.


반면에 영국은, 007 시리즈라는 확실한 스파이물의 고전을 시작해서 발전시킨 나라입니다. 007 1탄인 숀 코너리 주연의 007 살인면허가 1953년에 나왔으니 6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점에서, 할리우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역사라는 벽을 마주 대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빚도 지고 있지요.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만, 이 영화의 결론을 보다가 생각이 이렇게까지 번진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이 될 수 있었던 큰 이유가 미국 CIA가 영국 MI6에 심어놓은 KGB 이중 스파이가 정보로 KGB를 교란했기 때문이라는 이 영화의 카피라인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007에 대한 할리우드의 문화적인 열등감으로 읽었습니다. 007을 차용한 것은 맞는데(저는 이 부분에 하등의 불만은 없습니다. 좋은 텍스트를 잘 베끼고 편집해서 훌륭하게 재생산하는 것도 문화 콘텐츠 제작자가 해야 할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마냥 베끼기는 좀 뭐하니, 미국 입맛에 맞게 대놓고 비튼 것이지요. 조금 삐딱한가요? 트럼프 월드가 되고 나니, 내(미국)가 제일 잘 나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영화가 더 고개를 드는 것 같습니다. 미국식 영웅주의의 소소한 부활이라고나 할까요.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이 작품의 텍스트 및 콘텍스트는 개인적으로는 일정 부분 그렇게 읽힙니다.


냉전을 소재로 한 것도 조금 찜찜합니다. 냉전 체제가 무너진 이후 이 소재를 다룬 영화는 조금은 뜸했었는데 공교롭게도 최근 트럼프가 보이는 의도적인 냉전 체제의 재정립 움직임과 묘하게 맞아 보이기도 하고요 (너무 나갔나요, 영화는 영화일 뿐인데^^;;). 갈등을 조장해서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트럼프와 냉전이라, 잘 어울리는 한쌍입니다.


스파이의 세계, 국제 정보전의 세계에서 선악의 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속으면 악인이자 바보고 속이면 선인이자 스마트한 것이지요. 결국 CIA에 영국과 소련이 놀아났다는 결론은 조금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미국 만세라고나 할까요. '속이는 자를 속이는 것은 두 배의 즐거움'이라는 마키아벨리의 명언을 시종일관 실천해나가는 이들의 먹고 먹히는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미국이 그린 큰 그림에 모두 놀아난 것뿐이라는 일종의 허무 개그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스토리 텔링으로서 이 영화의 최고 단점은 결말이 초반부터 너무 뻔히 보인다는 겁니다. 뭐, 좋습니다. 결말을 미리 보여주더라도 이야기를 풀어갈 자신이 있으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 고도 기법에 자신이 없으면 최선을 다해 복선을 깔고 잘 숨겨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임스 맥커보이가 왜 본인의 정보원인 스파이 글라스를 죽이려고 총을 쐈는지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그가 알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불리한 정보가 부담스러워서 그랬겠지요. 감독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그 캐릭터를 처리는 해야겠고 그러다 보니 무리수를 둔 것입니다(샤를리즈 테론이 더 죽이고 싶었겠지요, 아마도. 본인의 정체를 머리 속에 담고 있는 인물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액션 영화에 이런 고도의 스토리 텔링까지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니 일단 패스합니다.


참,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시위 군중의 우산 씬은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한 장면이 생각나더군요. 멋진 오마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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