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산문집이?
어제 서점에 갔습니다.
원래도 '바로드림'때문에 종종 갑니다만, 어제는 오래간만에 평일 휴무라 책도 실컷 읽고 글도 좀 쓰고 오자 해서 몸도 마음도 가볍게 갔지요. 가서 사놓고 못 읽었던 책 중 하나인 장강명 작가의 '책, 이게 뭐라고'를 다 읽었습니다. (다음번 서평 및 감상문은 이 책입니다. 단숨에 읽었는데 재미있었고, 몇 가지 인사이트도 얻었습니다)
장 작가님의 책을 읽던 중, 조지 오웰의 산문집인 '나는 왜 쓰는가'를 언급하는 부분을 읽고 바로 책을 사러 달려갔습니다. (장 작가님이 인생 책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악령'도 추천했는데 샀는지 안 샀는지 생각이 안 나서 구입하지 못했습니다. 집에 와서 보니, 다행히(?) 안 샀더군요. 서점에 왜 커피숍이며 휴식 공간을 그렇게 들여놓는지 저는 너무나 잘 압니다. 이게 헤어 나올 수 없는 무한루프이자 늪이자 수렁이거든요. 커피 마시면서 책 읽다가 책 사러가는) 소설가의 산문을 워낙 좋아해서 기회만 닿으면 반드시 읽으려고 합니다. 그 출발점이 되어준 게 무라까미 하루끼의 '먼 북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깨는 일이 있었습니다. 네, 조지 오웰의 산문집이 있던 서가의 위치였습니다. 정치학 코너에 있더군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한참 생각했습니다. 조지 오웰의 산문집이 정치학 코너에? 왜? 소설가의 산문이니 당연히 문학 코너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혼란스럽더군요.
이유를 짐작해보니 하나는 그의 소설의 성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유명한 '1984'나 '동물농장'은 말 그대로 정치소설이니까요. 그런데 정치'소설'이지 정치학 책은 아니지 않나요? 그는 근본적으로 저널리스트였고 작가였습니다. 물론 작품의 정치적인 지향점이 뚜렷하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소설가인데 말이지요. 그런데 그의 산문을 정치학 코너에? 또 하나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번역한 출판사에서 이렇게 분류해서 보냈을 가능성인데, 글쎄요, 정확히 알 길은 없습니다만 황당하지요.
꽤 오래전에 어느 책에서 우리나라 도서 분류 체계의 무성의함(?)에 대해 한탄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로 들었던 책이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오스뜨로프스끼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였는데 이 책이 금속 및 제철/제강 분야로 분류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그 저자의 한탄을 그때는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는데, 실제로 비슷한 사례를 목격하고 나니 조금 당황스럽더군요. (이 책도 검색해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재고가 없어서 분류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오웰의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 읽고 난 후에 정치학으로 분류된 이유가 있네라고 동의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모르긴 몰라도 이 분류작업을 한 사람이 읽어보고 내용을 파악한 후에 이렇게 분류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이 다 그러하니 그 사람이 쓴 책은 다 그러하다'라는 일종의 편견을 목격했다고나 할까요? 솔직히 이런 기준으로 구분한다고 하면 조지 오웰의 소설은 전부 정치학 코너로 옮겨놔야 합니다.
무언가를 체계에 맞춰 분류하는 작업,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누군가 '학문을 한다는 것은 분류하는 것이다'라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중요합니다. 책을 처음에 접하는 사람에게 등대요 가이드라인이 되어줄 수 있거든요. 신중해야 하고 최대한 정확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선입견 및 편견을 제거하고 객관적으로 해야 합니다.
오래간만에 신박한 경험을 하고 나니 재미도 있으면서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서점 나들이는 계속해야지요. 책이 있고 커피가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