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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창고 Aug 26. 2015

수난 1 - 니코스 카잔차키스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하면 '그리스인 조르바'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만 저는 이 작품을 먼저 읽었습니다.(네이버에 올렸던 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작품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이제 읽기 시작했는데

카잔차카스의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참 신선하고 심오한 것 같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 ~ 1957)

* 한줄평 : 이 시대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한 묵직한 질문,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는가 ★★★★


1.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가장 탁월한 부분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인간군상을 지루하지 않게 그려낸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터키 지배下 그리스의 상황만으로 한정 짓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입니다. 자기 희생적인 삶의 모습을 보이는 이들은 지극히 적은데, 이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어’라고 당당하게 변명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를 포함한 현대인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결코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문학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작가는 고발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고 충실하게 묘사하려고만 합니다만 이게 오히려 더 힘있는 이야기 전개를 가능하게 한 것 같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소박하면서 평범 및 단순한 것 같으나 그 깊이는 남다릅니다.


2. 「각 마을은 하나의 벌집과도 같아.」

    「한 벌집에 두 여왕벌이 있을 자리는 없는

      법이지. 그자를 다른 곳으로 내쫓아야 해.

      사라키나는 내 벌집이야.」


교회가 들어서는 이유는, 성직자가 한 사람 더 늘어나는 이유는, 영혼구원을 위해서 입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거 같습니다. 낯선 사제 한 사람이 더 등장해서 지근거리에서 사역하는 것을 보고 기터줏대감인 사제가 속으로 생각하는 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과연 현대 성직자들을 포함한 소위 성도들이 이해관계를 최우선으로 두고 사는지, 아니면 영혼구원을 최우선으로 두고 사는지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봤습니다.


기득권이라는 것에 목숨 거는 이유는 불안함 때문이겠지요, 성직자이고 저 같은 평신도이고

간에 말이지요. 나이가 들수록 이런 원론적인 질문에 대해서 ‘하지만’이라고 토를 다는 순간이 많아지는 스스로를 보면서, 마음이 쓸쓸해지면서 또 씁쓸해지네요.


3. 「아가는 마을 사람 모두를 한 사람씩 목매달아

       죽이겠지. 한 명의 결백한 사람 대신 수천 명의

       결백한 사람들이 죽는 것이 옳다는 것이냐?

        수천 명보다는 단 한 명이 죽는 게 낫지 않나?

        게다가 마놀리오스 자신이 그걸 원하고 있어.

        그가 우리를 구하도록 내버려 두세나. 우린

        그 후에 그의 동상을 세우고, 그를 성자로

        추대하여 촛불을 밝혀주면 되지 않겠나?

        그때를 위해 그가 죽도록 내버려 두세.」


   「천 명의 마놀리오스가 죽더라도 내 손자는

     살아야 하네.」


1권 전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묵직한 울림을 줬던 부분입니다. 특히 한 명의 결백한 사람 대신 수천 명의 결백한 사람들이 죽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은 쉽게 답을 하지 못하게 만드네요, 옳다 또는 그르다라고. 사람들은 정의(正義)를 지키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정의(正義)를 지킵니다. 살아남게 해주면 정의인 것이고 나에게 해를 끼치거나 죽게 만들면 불의입니다. 위의 구절들이 펼쳐진 상황에 나를 대입시켜 보았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슬프게도,

그냥 침묵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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