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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창고 Aug 26. 2015

수난 2 - 니코스 카잔차키스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

역시 네이버에 올렸던 글 입니다.


* 한줄평 : 나는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하나님인가, 나의 이익인가 ★★★★☆


1. 위대한 문학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교훈을 준다는 것 입니다.

카잔차키스의 이 ‘수난’이라는 작품은 그 면에 있어서 교과서입니다.


거칠고 투박한 듯한 이야기 전개이고 문장들입니다만 힘이 있는 것이 이 작품의 내용은 기독교를 넘어서 ‘종교’라는 것이 존재하는 어떤 시공간적인 배경에 적용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사실적이고 깊은 울림을 줍니다.


2.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유다가 예수를 팔았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알 것 입니다만

이 작품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유다’가 ‘예수’를 직접 죽이는 존재로 구체화되는데요, ‘예수’에게 ‘막달라 마리아’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것이 가장 직접적이 이유가 됩니다. (부활절을 기념하는 예수 수난 및 부활 연극의 배역을 배정하는 것이 이 소설의 중요한 출발점인데요, 각각의 배역을 맡은 사람들에게 나름의 결말들이 작품 안에서 이뤄집니다.)


이런 자의적이고 조금은 과도한 작가의 소설적인 상상력의 발휘에 대해서 거부감이 든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 자체에 대한 해석 및 확장적인 적용이 어느 정도 범위까지 가능한 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고민이 많습니다. 다만 오늘날도 종교라는 탈을 쓰고 얼마나 더러운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기에, 이 작품도 그 연장선 상에서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3. 「우리가 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신부님?」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사랑하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심각한 논리적인 모순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 안에서는 사람들의 이해관계 및 이기심이 기반이 되어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면서 비성경적인 일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일어납니다.


‘나눔’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볼셰비키로 몰아가는 그 당시의 모습에서 오늘날 서로를 ‘좌’니 ‘우’니 하면서 비웃고 미워하고 더 나아가 증오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웃음도 안 나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나눔을 이야기하는 것이 곧 인본주의 신앙이요 빨갱이 사상은 아닙니다.

그렇게 몰아가면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가 가장 위험한 인물인 이유는 그에게선 아무 결점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왜 당대에 그렇게 위험인물이 되었고 박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결점이 없다는 것도 큰 이유가 되었을 것 입니다.

이 시대에도 분명이 수많은 의인들이 존재할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나요,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고 있지는 않나요?


「콘스탄티노플 신학교를 졸업했나?」

「아닙니다, 주교님.」

「그러면 당신은 말할 권리가 없다! 난 당신과

  논쟁하지 않겠네, 사제.」


예나 지금이나 학벌은 어느 직업군(?)에 가더라도 정말 편리한 필터링의 도구가 되어 주는 것 같습니다. 저 주교와의 대화 이후로 포티스 사제는 무력항쟁도 불사하는 무시무시한 캐릭터로 변신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이 어떤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이 책은 리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은 빼시오, 사제. 우리 일에 신을 끼워 넣지

  말란 말입니다. 당신은 포티스 사제를

  두려워하고 난 마놀리오스를 증오해요.

  그게 다요. 신과 성모 마리아를 결부시키지

  마십시오. 그건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소.」 


신, 하나님의 이름과 뜻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마음대로 가져다가 붙이는 일부 목회자들의

어처구니없는 모습이 위의 구절을 읽으면서 자꾸 오버랩이 됐습니다. 사실 목회자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소위 성도라는 무리에 속해 있는 저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슬픔입니다.


「난 양도 늑대도 아닌 얼뜨기라서 늑대는 날

  물어뜯고 양은 날 밀어내지.

  난 무엇이 옳은지 잘 알지만, 행동으로 옮길

  힘이 없어.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면서도

  계속 침묵하고만 있었어. 무서워서 말이야.」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바울 사도의 외침이 귀에 메아리 칩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인정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실천력이 필요합니다.

복잡하게 생각만 하고 이리저리 재기만 하다가는 정말 이 교장선생처럼 어이없게 생을 마감하게 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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