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여름과 친해지기로 했다

by 이영미

나는 여름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습하고 끈적한 공기, 땀이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그 감각이 늘 불쾌했다.

가끔은 여름에도 보일러를 켰고, 제습기를 틀어놓은 채 방 안을 메마르게 만들곤 했다.

빨래는 항상 건조기에서 꺼내야 마음이 놓였다.

햇볕 아래 바싹 말라 빳빳해진 수건을 손에 쥐고 있을 때, 나는 그 깔깔한 감촉이 좋았다.

뽀송한 공기, 드라이한 환경, 그것이 나에게 ‘쾌적함’의 전부였다.

여름이면 나는 자연보다 냉방기를 택했고, 29층 집 창밖으로 아무리 시원한 바닷바람 과 산바람이 불어도, 나는 여전히 차가운 실내를 찾아 헤맸다.


반면, 겨울은 내가 가장 사랑하던 계절이었다.

차가운 공기와 서걱이는 눈길,

코끝이 시리고 손끝이 얼어붙는 그 매서움이 오히려 정신을 또렷하게 해주었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던 하얀 세상은, 마치 마음까지 정화되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따뜻한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창가에 앉아 있노라면

이 계절이야말로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나의 계절이 어느 날부터 몸을 거스르기 시작했다.

몇 해 전, 나는 ‘쇼그렌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으며,

눈은 작은 먼지에도 시리고,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피로라고 넘겼지만,

결국 병원에서 ‘자가면역질환’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몸이 스스로의 샘을 공격하는 병.

완치는 없고, 평생을 함께 살아가야 하는 병.


진단을 받고 맞이한 첫 겨울,

그동안 좋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고통이 되었다.

차가운 공기에 눈이 아프고, 입술은 갈라져 피가 맺혔으며,

코 안이 말라 숨 쉬는 것조차 불편해졌다.

따뜻한 이불 속에 있어도 건조한 방 안 공기가

목과 코를 죄는 듯했다.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던 겨울은 더 이상 나를 감싸주지 않았다.

사랑하던 계절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은,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겨울을 견디는 것이 괴로워질수록,

나는 여름을 조금씩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습하고 축축한 공기가, 어느 날부터는 고맙게 느껴졌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말라붙은 내 몸을 적셔주는 것 같았고,

불쾌하기만 했던 더위가 이젠 조금은 숨통을 틔워주는 것처럼 다가왔다.

습한 날이면 입안이 덜 아프고, 비 오는 날엔 눈이 덜 시렸다.

땀이 나는 것을 피하던 내가, 이제는 일부러 더운 공간에 머물렀다.


내 몸이, 그리고 마음이 차가움보다 따뜻함을,

건조함보다 습도를 필요로 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 변화의 끝에서 나는, 제주 사려니숲을 만났다.

비 오는 날, 붉은 화산석 송이가 깔린 숲길은

폭신하고 조용했다. 발끝에서 퍼지는 촉촉한 감각은

마치 땅이 내 숨을 대신 쉬어주는 것만 같았다.

초록이 겹겹이 쌓인 나무 그늘 아래서 피톤치드 향이 깊게 퍼지고,

풀잎 위에 맺힌 물방울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

나는 오랜만에 편안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 숲은 더웠지만 시끄럽지 않았고, 축축했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부드럽고 조용하게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숲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 계절도, 너의 편이 되어줄 수 있어.“


좋고 싫음은 영원하지 않다. 몸이 바뀌면, 마음도 바뀌고

그 마음이 머무는 계절 또한 달라진다.

나는 여전히 겨울의 고요함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이제 추억 속에 살고 있다.

이제는 여름이 내 일상을 감싸고, 축축한 공기 속에서 나는

내 몸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변화는 불편했지만, 그 불편함이 나를 살렸다.

그래서 나는, 이제는 여름과 친해지기로 했다.

조용히, 조금씩,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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