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줄의 보고가, 30년을 지켜온 나를 흔들어 버릴 줄은 몰랐다.
책임감은 늘 나보다 먼저 움직였고, 나는 그 책임이 만들어준 단단함을 믿어 왔다.
그래서 자리를 비우는 순간에도, 내가 걸어온 시간이 누군가의 손에 이어질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다.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던 자리를 후배에게 넘길 때도 그랬다.
나는 그가 흔들리지 않도록 이유와 과정, 앞으로의 방향까지 차근차근 건넸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떠나고서야 알았다.
내가 남긴 말과 마음이, 상대에게는 온전히 닿지 않았다는 것을.
첫 출근길, 다른 동료를 통해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내 이름으로 올라간 보고는 내가 전한 내용과 달랐고, 마치 내가 중요한 일을 숨기고 떠난 사람처럼 기록되어 있었다. 순간, 오래 지켜온 나의 이름이 낯설게 흔들렸다.
나는 다시 설명하고, 정정하고,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굳어진 오해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누군가의 단순한 착오였을지 모르지만, 그 작은 틈으로 스며든 말들은 나를 한순간에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날 밤,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억울함과 허탈함보다 더 깊었던 것은 ‘이렇게까지 흔들릴 수 있구나’ 하는 당혹감이었다.
새벽빛이 번지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문제가 된 보고보다, 내가 잃을까 두려워했던 것은 오랜 시간 쌓아온 나에 대한 믿음이었다는 것을.
다음 날, 나는 후배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 부분은 내가 다시 책임지고 정리할게. 혹시 또 이야기가 나오면 알려줘.”
화를 내거나 탓하고 싶은 마음도 스쳤지만, 그 감정이 그에게 닿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도 아직 세상의 무게를 배우는 중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순간, 내 안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일어났다.
‘이제 마음을 덜어내도 된다.’
처음엔 차가운 결심처럼 느껴졌지만, 곧 알게 되었다. 그 목소리는 누군가를 밀어내는 마음이 아니라,
상처받은 나를 잠시 보호하려는 또 다른 나의 조용한 움직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살아가며 여러 형태의 나를 마주한다.
책임을 앞세운 나, 상처에 흔들리는 나, 그리고 때로는 거리를 두며 나를 지키려는 나까지.
그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할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이루는 필연적인 조각들이다.
책임감은 때때로 나를 아프게 하지만, 그 아픔을 지나오며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지를 다시 배운다.
오늘의 나는 누군가의 오해로 규정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시간과 성실함으로 나를 세워 온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또 다른 나와 함께 조금 더 단단하게 앞으로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