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르게 기억해도 괜찮은 이유

by 이영미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연애 시절, 남편과 함께 보았던 첫 영화의 제목도, 극장의 위치도, 그날의 공기까지도 또렷하다. 그때 느꼈던 두근거림과 설렘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래서 종종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남편과 함께 웃곤 한다. 하지만 가끔은, 그 기억을 나 혼자만 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얼마 전 여행 일정을 짜다가 “겨울이니까 온천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문득 덕구온천이 떠올랐다. 스파월드 수영장에서 다섯 살이던 아들이 물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며 버티던 날, 남편과 나는 번갈아가며 아이를 놀아주었다. 저녁이 되자 지친 팔이 덜덜 떨리고, 졸린 눈으로 밥을 겨우 떠 넣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런데 남편은 그날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몰라, 그런 일 있었나?”

그 한마디에 마음이 조금 언짢아졌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 같은 추억을 공유했는데 왜 나만

그 장면을 선명히 기억하는 걸까.

억울한 마음에 “내 기억이 맞아. 당신이 잊은 거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편은 잠시 나를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게 꼭 18년 전 일인데, 당신 기억이 다 맞다고 할 수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잠시 멎었다. 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서운함이 먼저 밀려왔다. 나는 말을 삼키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남편의 무심함이 아니라, 어느새 흘러가 버린 시간을 질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날의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다. 다른 날, 다른 장면이 뒤섞였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늘 자기중심적이다. 보고 싶은 장면만 남기고, 듣고 싶은 소리만 저장한다

그래서 그것은 진실이라기보다, 감정의 흔적에 더 가깝다.


어쩌면 나는 ‘기억’이 아니라, 그때 우리를 감싸던 따뜻한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이의 웃음, 물에 젖은 머리카락, 서로를 바라보며 지었던 피곤한 미소까지. 그때의 온기를 다시 꺼내, 남편과 함께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기억은 우리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상처를 다시 꺼내 보여주기도 한다.

좋은 기억은 삶을 단단하게 붙잡아주는 뿌리가 되지만, 왜곡된 기억은 관계를 흔들고 마음을 멀어지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순간이 결국 ‘나’를 만든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배우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며,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때로는 시간이 진실을 비틀더라도, 그 안에는 여전히 ‘그때의 나’가 살아 있다.

그것이 기억의 잔인함이자, 동시에 따뜻한 축복이다.



이제는 안다.

기억이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낸 시간의 모양이라는 것을. 같은 일을 겪고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건, 각자가 다른 마음으로 그 순간을 살았다는 증거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장면들도 언젠가 다르게 남을 것을 안다. 하지만 괜찮다.

누군가의 시간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이 조금은 흐릿하게 변하더라도 따뜻하게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다르게 기억해도 괜찮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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