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동이 잦은 조직에서 일하다 보면, 해마다 한 번씩 낯선 계절을 통째로 건너가는 기분이 든다.
문 하나를 열면, 이전 점장이 남기고 간 시간의 결이 그대로 공기 속에 스며 있다.
어떤 곳은 햇살처럼 가볍고 부드럽고, 어떤 곳은 오래 닫혀 있던 방처럼 묵직한 냉기가 가라앉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어디를 가든 비슷한 차이를 늘 느껴왔다.
잘되는 영업장은 공기 자체가 따뜻하게 흐르고, 하위권 영업장은 시간이 어딘가에서 살짝 멈춰버린 듯 고요하다. 그곳에 발을 몇 걸음 내딛기만 해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천천히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마치 오래 묵은 감정들이 방바닥 아래에서 숨을 고르는 것처럼.
이번에 발령받은 부산의 영업장이 그랬다.
첫날 문을 여는 순간, 싸늘한 기운이 살갗을 스쳤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아도 풍기는 분위기, 그 침묵 속에 배어 있는 오래된 한숨. 벽과 천장 어디엔가 스며들었다가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감정의 잔향처럼.
그리고, 20명의 눈빛.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눈빛. 겉은 차갑지만 그 끝자락에서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감정 하나.
나는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건 ‘기대’였다.
한 번쯤은 달라지고 싶다는 마음, 누군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 이 조직을 끝까지 붙잡고 있게 했던 마지막 온기였을 것이다.
그 눈빛은 오래 잠들어 있던 내 안의 불씨를 건드렸다.
누군가의 리더가 된다는 것.
그 책임의 온도가 다시 나를 뜨겁게 했다. 그래서 첫 출근날, 나는 작은 자리를 만들었다.
떡과 계란, 고구마와 호빵. 겉으로는 소박한 간식이었지만,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작은 온기’ 하나쯤은 건네고 싶었다.
그 자리에서 막혔던 마음들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불만이든, 서운함이든, 오래 눌러왔던 감정이든. 말들이 하나둘 흘러나왔다.
그 말이 전부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은 포기한 자리에서는 침묵한다.
입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여전히 이곳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 울분 속에서 흐릿하지만 분명한 온기를 느꼈다.
잔잔하게 살아 있는 숨결처럼. 이 조직은 죽지 않았다. 다만 오랫동안 숨을 참아왔을 뿐이었다.
손봐야 할 일들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막막할 만큼 실타래가 얽혀 있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무겁지 않았다. 그들의 말속에는 분명, 조용한 애정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떠난 자리는 공기가 비어 있고, 그 빈자리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누군가의 마음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차근차근 리스트를 만들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일, 시간이 지나야 만 풀리는 일. 그 모든 항목의 중심에 ‘사람’을 두었다. 어떤 리더십도 결국은 사람이 버티게 하는 힘에서 나온다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리더십이란 앞에서 깃발을 흔드는 일이 아니라, 뒤에서 기울어진 마음 하나를 살짝 떠받쳐주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이곳에서 다시 배운다. 하위권이라는 말은 오래도록 부끄러운 이름처럼 쓰였지만 이제 나는 그것을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온도가 낮다면, 조금 더 오래 머물러 데우면 된다. 마음이 닫혀 있다면, 조용히 문 앞에서 기다리면 된다.
나는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
불을 키우는 사람보다는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사람으로서. 이곳의 온도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올라가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이 공간의 마음을 살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