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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았다곰 Dec 13. 2021

일을 그르치기는 쉽다.

그러나 일이 되게 만들기는 어렵다.

몇 해 전의 일이다. 학교에 새로운 교장 선생님께서 부임하셨다. 당시 학교의 체육업무를 맡고 있던 터라 체육행사, 운동부의 여러 일로 상의도 드리고 보고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때의 일이다.


당시 우리 학교는 수영부와 유도부를 운영 중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도부는 부임하면서부터 4년 동안 맡았던 업무였고, 내가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각별했다. 특히 교장 선생님께서 부임하던 해는 5학년 꼬맹이들이 정상에 오를 내년을 기약하며 땀을 흘리고 있었고, 학교에서도 교육청에서도 아니 전국에서 기대와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내년의 주요 대회에서 3 체급 이상에서 두각을 나타낼 터였다.


2학기에 부임하셨던 교장 선생님은, 그런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있던 학교에서 씨름부, 탁구부 다 없애고 나왔어! 여기도 마찬가지야."라고.


정확한 토씨는 기억나지 않지만 의미만 전달하자면 저 정도. 내 귀를 의심했다. 곰 같은 코치와 감독이 2학년 꼬맹이들을 유도시키겠다고 꼬드겨서 4년을 버텨 이제 겨우 운동부다운 행색을 갖춰 이제 날아볼까 잔뜩 기대에 부풀었는데, 그 담당자에게 저런 말이라니.


일종의 무용담을 늘어놓으셨다. 운동부 학생들은 자꾸 사고를 치고, 학부모의 민원에 등쌀을 앓았던 모양이었다.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었는데, 내가 모두 다 없애고 왔노라고. 몇 단어만 다른 말로 치환하면 학교 운동부 역사에 큰 족적이라도 남긴 줄 알겠더라.


물론 그 외에 다른 면에서는 크게 모난 데 없이 학교 운영을 하셨던 분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인 감정도 없다. 난 그 해를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나야 하는 시기가 되었고, 여러 사람들의 만류에도 다른 학교로 전근을 떠났다. 그래서 그 교장선생님과 지낸 시간은 겨우 한 학기에 불과하다. 뭐 악감정을 쌓으래야 쌓을 물리적 시간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지내는 시간 내내 운동부의 존폐에 대해 의견 충돌이 잦았다.


학교 운동부를 통한 엘리트 선수 육성체계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할 말이 많으나 그런 걸 떠나서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운동선수로서의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은 꼬맹이들에게 당시 교장선생님의 개인적인 의견과 무용담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사실 코치가 제일 많이 고생했다. 부임하기 2, 3년 전만 해도 대성한 선수들이 많은 유도 명문이었다는데, 나와 코치가 동시에 부임했던 해에 유도부 선수는 고작 3명이었다. 그마저 4, 5학년 학생들은 공부해야 한다고, 친구들과 놀아야 한다고 나오는 둥 마는 둥 하더니 1년 후에 쿨하게 유도부를 그만두었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6학년 학생은 1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온갖 대회에 출전해도 흔한 시대회에서조차 1승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더니 중학교에 가서 태권도로 전향했다.


급한 대로 5학년 학생들 중 덩치가 큰 놈들을 꼬드겨 구색이라도 맞춰볼까 했는데, 있던 선수도 그만두는 판국에 그 학생들이야 오죽할까. 동시에 4년 후를 기약하며 우리 반이었던 2학년 꼬맹이들 중 성질머리가 있는 놈들을 유도부에 끌고 왔다. 상상이 되나? 190cm, 120Kg(아마도..)가 넘는 거구의 코치가, 아직 구구단을 외우고 있을 2학년 꼬맹이들과 유도장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다음 해에 또 2학년 담임을 맡은 김에 또 성질머리에 체력까지 넘치는 놈들을 하나씩 유도장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도. 3년이 지나고 나니 간식도 풍성하고 대회 출전을 핑계로 며칠씩 학교에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다른 꼬맹이들도 합류했다. 물론 표현 그대로 꼬맹이들의 집합소였다. 그때까지는.


코치는 이 꼬맹이들을 붙잡느라 윽박도 지르고, 얼르기도 했다. 때로는 함께 목욕탕에 가서 발가벗은 꼬맹이들의 몸을 씻겨주기까지 했고, 학교에서 훈련이 끝나면 저녁 훈련까지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다가, 저녁 훈련을 마치고 나면 하나씩 집에 데려다주었다. 어떤 이유로 집에 들어가기 싫은(또는 들어갈 수 없는) 경우가 생기면 자기 자취방에 데려가 재우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실적이라도 있으면 보람이라도 있으련만, 2학년 때 첫 유도복을 입었던 꼬맹이들이 3, 4학년이 되었다고 뭐 대단한 성과가 있었겠는가. 정말 거짓말처럼 3년 내내 1승을 거두지 못했다. 이쯤 되니 학교에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학교 예산을 펑펑 써가며 오후, 저녁 훈련에, 방학 때는 전지훈련까지 꼬박꼬박 챙겨가는 운동부에서 3년 동안 1승을 챙기지 못했으니, 이 정도면 패전 장수로 석고대죄라도 할 일이었다.


그렇게 3년이 흐르고 4년이 되던 해. 2학년이었던 꼬맹이들이 어느덧 5학년 꼬맹이가 되던 해에 거짓말 같은 승리를 챙겼다. 그것도 초등학교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1승 정도가 아니라 동메달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전국소년체육대회는 올림픽이라고 보면 된다. 선수에게 가장 큰 커리어이면서 학교와 교육청에서도 전력을 쏟는 대회인 터라 6학년들의 잔치인 그 대회의 격투 경기에서 5학년이 동메달을 거머쥐다니! 코치는 모르겠는데, 난 울 뻔했다. 기뻐서가 아니라 안도의 눈물. 아, 드디어 밥값 했다.


한번 물꼬터져서였을까. 아니면 함께 동고동락하던 친구가 쾌거를 거둔 데 질투를 느껴서였을까. 다른 꼬맹이들도 안 보이던 투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좋은 성적에 선수층까지 두텁다고 소문이 나면서 졸지에 유도 명문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마지막 대회인 제주컵에서 5학년 2명, 4학년 1명이 금메달을 거두었고, 저학년 동생들도 나름 인상 깊은 경기를 치르면서 일약 전국이 주목하는 학교가 되었다.


나는 그저 뽑아놓고, 간식 사다 나르고, 영수증만 챙겼지, 실제 코흘리개들을 선수다운 모습으로 성장시킨 건 코치였다. 선수들을 뽑을 때 성질머리 있는 놈들 위주로 선발하다 보니 당연히 온갖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학부모 쫓아다니며 사정하고, 빌고, 애원하기를 4년이었다. 확신도 없었다. 얘들이 정말 성적을 낼 수 있긴 할까? 나는 이 꼬맹이들에게 정말 제대로 된 길을 추천한 걸까. 우리는 지금 바른 길로 가고 있나?


그 해에 그런 소릴 들었다. 운동부를 없애겠다고.


일을 망치기는 쉽다. 맛있게 먹으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요리한 음식에 똥물 한 스푼 아니 한 방울이면 아무도 먹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더 토악질이 나오게 할 수 있을까, 어찌하면 더 몹쓸 소리가 나올까 고민 정도가 노력이라면 노력이랄까.


반대로 일을 되게 만들기는 어렵다. 준비할 것도, 확인할 것도 많은 데다, 우선 나부터 확신이 서야 하는데, 나라는 사람이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확신이 서겠나. 그저 내게 주어진 일을 차근차근 해결하는 데 급급한 거지.


하물며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 어떻겠는가.


꼴랑 4년, 그것도 정말 열심히, 죽도록 열심히 했냐?라고 물었을 때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알량한 노력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렇게 주절대냐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얘기하고 싶다. 사람을 키우는 건 어렵다. 매우.


비난하기는 쉽고, 일을 그르치는 건 더 쉬운 건 알겠는데, 그래서 이해는 하겠는데. 최소한 노력하는 사람 앞에서 네 노력이 헛되다고, 의미가 없다고 말하지는 말라. 그렇지 않아도 확신이 서지 않고, 다른 길이 맞지 않을까 서성이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한마디 비난과 한 줌 충고가 생각보다 아플 수 있으니. 아니 적어도 당신의 비난과 훈수가 무용담처럼 들리게 하지는 말라.


내가 그리고 그들이 대단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최소한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무던 애쓰는 중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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