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밟는 일

by 사사소소

기어코 경험을 해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아니,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한 것들 대부분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알게 된다. 가령 사랑 같은 것들 말이다.


내 첫사랑의 기억은 초록색이다. 엄마의 여름 원피스에는 초록색 바탕에 하얀색 야자수 무늬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감촉이 아주 보드라웠고 살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아주 어렸던 나는 치마자락에 얼굴을 파묻었고, 엄마 손이 내 머리를 쓸었던 것 같다. 어린 내게 사랑은 완벽한 안전감이었다.


우리 아빠는 성난 불곰처럼 노발대발 했었다. 초등학교 2학년 쯤이었나, 수영장에서 점프한 한 남자아이의 무릎에 눈위를 정통으로 맞았다. 나는 수영장이 떠나가라 울었고, 아빠는 그 조그마한 소년이 불쌍해 보일만큼 화를 내셨었다. 보호하는 사랑은 분노의 모습이기도 하다.


밤 새 통화를 하고 동이 틀 무렵 나와 그는 또 만났다. 함께 아침을 먹고 서로의 강의를 훔쳐 듣고, 내려오는 두 눈꺼풀을 더이상 견딜 수 없을 때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대학생 시절의 낭만적 사랑은 끝없는 갈망, 갈망, 갈망이었다.


딸 아이는 새로 옮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버텼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딸의 얼굴과 눈물로 얼룩진 티셔츠. 내 가슴에 난 구멍은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시큰거렸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덜어줄 수 없을 때, 사랑은 슬픔이 되기도 한다.


나와 남편이 함께 지낸 날은 5,840쯤 된다. 그 길 위에서 수많은 부와 침을 겪으며, 서로의 수많은 얼굴들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얼굴들을 용납하기로 끊임없이 선택한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것. 때론 그것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다.


물론 모든 경험치를 뛰어 넘어 존재하는 사랑의 본체가 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내가 지금껏 경험한 사랑이라고 해봤자,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 어쩌다 그림자만 밟아도 이리 충만한데, 그 본체의 광채는 얼마나 빛날까. 이 땅에 숨쉬는 동안 그 사랑을 더 알아가고 싶다. 그리고 그 빛의 일부라도 잘 반사해 내도록 나를 깨끗이 닦아내는 일에 더 부지런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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