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퍼백(shopper bag)
한참을 벼르다가 장만한 카드지갑이 있다.
준 명품정도로 꽤 값나가는 제품이므로 가죽도 부드럽고 금장도 고급스러워서
굉장히 아끼며 들고 다니게 되었다.
카드지갑이라 신용카드가 3개까지는 들어가지만 3개를 다 넣으면 지갑이 늘어나는 것이
아까워서 달랑 교통카드 1개만 넣어 다녔고,
때문에 남편이 활용도 "빵점"을 줘버린 지갑이다.
흥! 그래도 이렇게 예쁜 가죽이 늘어나는 걸 어떻게 보냐고~
내가 생각해도 살짝 당황스럽다. 물건을 이렇게 조심해서 쓴단 말이지?
이 지갑은 내 카드를
모두 담는 것이 아니라,
교통카드 찍는 게 전부야!! 훗~
그러다가 결국 사건이 일어났다.
쇼퍼백 앞지퍼에 무심코 카드 지갑과 볼펜을 함께 넣어버린 날,
그렇게 아끼던 카드지갑 가죽에 볼펜이 쫙- 그어져 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기려고 그런 건지 평소에는 가방 뒤쪽에 수첩과 함께 얌전히 있던 녀석이
오늘은 왜 여기에 들어가 있는 건지... 난 어쩔 줄 몰라했다.
만만하게 들고 다니던 지갑이었다면 급한 대로 침이라도 묻혀서 닦았겠지만
비싼 가죽이 상할까 봐 염려되어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급하게 인터넷 검색을 했다.
고급, 가죽지갑, 볼펜... 여기까지만 쳐도 나와 같은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먼저 검색해 본 '가죽 클리너'가 줄지어 뜬다.
역시~ 위급상황에서는 빠른 대처가 최고다!! 다행이다.
이것만 사면 가죽도 상하지 않으면서 볼펜자국을 깨끗이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급한 마음에 침으로 닦지 않길 잘했다고 안심했다.
나에게도 질 좋고 비싼 가죽가방이 있다.
명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과 함께 있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의 품질은 된다.
나처럼 예쁜 물건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 가방 하나 없겠느냐만은, 가지고 있는 가방 중에서
여기저기 부담 없이 잘 쓰고 있는 가방은 오히려 저렴한 가격의 '나일론 쇼퍼백'이다.
그다지 고급소재가 아니어서 오염이 묻거나 구김이 생겨도 마음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고, 1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거의 매일 들고 다니다시피 했으니
'책가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물세탁이 가능하고 생활방수가 되는 나일론이라서 비 맞아도 걱정 없고, 쇼퍼사이즈라 계획에
없는 쇼핑할 일이 생겨도 가방에 몽땅 쓸어 담고 다녔으니 세상 편했다.
검은색이라서 어떤 옷과도 코디걱정 없고, 눈, 비 오는 날까지 아끼지 않고
들고 다니기에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가벼워서 점점 무거운 가방이 힘겹고 싫어지는
나에게 최상의 가방이 돼주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주 들고 다녔으니 시쳇말로 “뽕뽑고도 남을” 정도의
활용도 1000점은 족히 받을 수 있는 가방이다.
생존아이템으로 가방을 생각했을 때 비싼 가죽가방보다 저렴한 나일론백을
먼저 떠올린 이유는 고급가방보다 더 자주, 잘, 막 쓰는 것이 바로
이 쇼퍼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가죽가방이었다면 적당히 사용감이 느껴지고 변색도 되어
멋지게 세월을 입었겠지?
그러고 보니 난 웬만한 얼룩에도 노심초사하지 않고 힘 하나 들이지 않으면서
명품가방을 만들어놨다. 게다가 이건 모서리가 닳을 염려도 없는 정말 튼튼한 가방이다.
의미 자체로는 ‘물건 사는 손님의 백’이라는 뜻으로, 쇼핑할 때 이용하는 커다란 손가방이나
그런 크기의 패셔너블한 숄더백을 말한다.
점포 이름이나 상품의 패키지 디자인을 그대로 프린트 인쇄한 것도 쇼퍼백으로 부른다.
주로 비닐제로 세제 등의 상품과 같은 모양이나 색상을 화려하게 하여 컬러풀하고 유니크한
쇼핑백 형태로 활용되다가 점차 유명 브랜드에서 고급 소재를 활용해 다양한 쇼퍼 백을
만들어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참조-네이버 지식백과, 패션전문자료사전]
물건에 압도당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되면 평소에도 편하게 사용하지 못할뿐더러
이런 일이 생겼을 때 괜히 속 좁은 인간처럼 전전긍긍하게 되기 때문이다.
얼마나 기막힌 노릇인가?
카드를 보호하고 편하게 쓰려고 구입한 물건에 그깟 볼펜자국 좀 생겼다고
그에 따른 물건을 또 사기 위해 길거리에 서서 인터넷 검색하는 일에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래 방치할수록 지우기 어렵다고 해서 다음날 도착할 수 있는 제품을 급히 찾았고
구매한 가죽 클리너가 바로 도착했다.
혹시 실수라도 할까 봐 설명서대로 조심스레 볼펜자국 위를 문질러 보았다.
감쪽같이 지워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클리너가 좋은 제품이 아니었는지 제품설명처럼 깨끗해지지 않았고,
오염부위의 가죽 광택까지 희미해져서 손대지 않느니만 못하게 되었다.
고급가죽 제품에 생긴 볼펜자국을 깨끗이 지워준다는 클리너는 그냥
잘 포장해서 서랍에 넣었다.
아마 소중한 가죽 제품에 다시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부드러운 안경닦이로 지갑을 한번 더 닦고 오염부위를 살펴보았다.
클리너로 지웠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처음보다는 볼펜자국도 옅어졌고,
잃었던 광택도 조금은 되살아나 보였다.
벌써 이 정도로 회복됐으면 앞으로는 더욱 티가 나지 않을 텐데,
그렇게 수선을 피우고 부주의했던 나를 자책했던 걸 생각하면 혼자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실망감을 느낀 것은 지갑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아서도,
돈 들여서 산 가죽클리너가 소용없어져서도 아니다.
비싼 돈 주고 큰 맘먹고 산 지갑이지만 처음부터 난 이 지갑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그 작은 소품에 제대로 휘둘려 버렸다는 사실에 따른 실망감이었다.
누구나 어찌어찌해서 고급제품을 구입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정말
내가 소유한 물건으로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타고난 내 성격 때문이든, 경제적인 깜냥 때문이든, 지금은 이 지갑을 편하게
쓸 수 없는 상태인 건 인정해야 한다.
비싼 물건이 마음에 들 때면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하는 농담이 하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건데 알고 보니까 그게 명품이었던 거지~
워낙 눈이 높아서 찍었다 하면 명품이더라."
혹시 이런 말을 어디서 들었다면 그냥 웃어주면 된다.
정말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렴한 보세제품으로도 훌륭한 코디를 선보일 수
있어야 한다. 비싼 물건은 누구나 골라낼 수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비싼 물건을 어떤 상황에서도 편하게 쓸 수 있는 '내가' 되는 것이다.
웬만한 사건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도록 돈을 더 벌던지, 소심한 나를 강심장으로
만들던지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비싼 가죽가방에 그어진 볼펜자국에 의연하려면 아무래도 좀 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진정한 명품과 단순한 사치품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 값비싼 것만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항상 일깨우려 애쓴다.
그것이 물건에 압도당하지 않고 어울리는 아이템을 적절히 쓰면서 내 매력을 뽐내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 속에서 가방이 내 머리를 막아줘야지 내가 가방을 가려주느라
비에 다 젖어버린다면 너무 우수은 모양새가 되지 않을까?
내가 가방의 주인이지 가방이 내 주인인 건 아니다.
그러니까 만약 우산도 없는데 비가 내린다면 가방이 내 머리를 보호해줘야 한다.
그런 내 모습이 더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