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저 (blazer)
조카의 결혼식이 다음 주로 다가왔다.
가족들은 모두 그날 입을 옷 코디하느라 마음이 분주해 보였다.
남편은 옷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아들 옷을 대신 점검하느라 신경을 쓰고 있었고,
딸아이는 몇 년 만에 가보는 집안 결혼식에 참석할 생각으로 마음이 설레는 모양이다.
인터넷으로 “학생 결혼식 하객룩”까지 검색해 보며 옷을 고르는 중이다.
친조카인 데다가 조카 중 처음 결혼을 하는 것이라 의미가 남다른 예식이니만큼
대충 차리고 갈 자리는 아니어서 나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서
코디가 끝났으므로 새로 옷을 사야 한다던지 미리 맞춰볼 필요가 없었다.
이것이 '있는 자'의 여유던가?
윗사람의 결혼식이라면 적당히 예의를 갖추어 예쁘게만 입으면 될 텐데
내가 연장자이다 보니 단순히 예쁜 옷만 입기에는 뭔가 빠진 느낌이 들었다.
더 필요한 것은 ‘무게감’이었다.
집안 어른으로써의 포스랄지, 품격?
오늘을 예상한 것인지 제작년에 욕심껏 좋은 블레이저를 하나 장만해 놓긴 했다.
심플한 기본형 디자인이지만 이중칼라의 디테일이 은근히 돋보이는 블레이저로
혼자 쇼핑을 나갔다가 첫눈에 반해서 구입하게 되었다.
내구성 좋은 원단과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 내 몸에 착-감기는 핏은 그동안 찾아 헤맨
단 하나의 블레이저로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에 가격표도 안 보고 구매를 결정했으니
이것이야말로 마르고 닳도록 입어야 할 아이템인 듯싶다.
때문에 이런 특별한 날 입을 옷이라면 '블랙 블레이저'를 우선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며 가지고 있는 블랙 원피스와 코디하면 적당할 것이다.
블레이저의 어원인 블레이즈(blaze)는 <불꽃, 섬광, 타오르는 듯한 색채, 불타오르다>는 뜻이 있다.
블레이저는 콤비 상의를(흔히 단체복으로 통일된) 총칭하는데, 유래를 보면 어원에 충실한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해마다 템스강에서 열리는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보트경기에서 유래하였는데
1877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레디 마가렛 보트 클럽의 선수들은 모두 케임브리지 세인트 존스 컬리지의
학교의 시그니처 색상인 진홍색의 유니폼을 입었다.
경기를 위해 보트에 오르기 전, 학생들은 동시에 진홍색 상의를 일제히 벗어던졌고 그 광경이 뜨거운 햇살을
받아 불타오르는 느낌을 주게 되자 응원을 온 관중들이 '어블레이즈(Ablaze)!'라고 함성을 질렀다.
이후 금장버튼이 불꽃처럼 타오르게 빛나서(blazing), 블레이저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또한 1897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해군 함선 '블레이저호'를 방문하자, 함장은 여왕 앞에서
단정하고 산뜻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승무원들의 제복에 놋쇠로 만든 단추를 달도록 지시했고
그 스타일을 맘에 들어한 여왕 때문에 다른 함대에서도 그 스타일을 차용하게 되었다.
버튼과 재단에 따라 다양한 블레이저 스타일로 발전하였고 캐주얼과 클래식룩에 가장 기본적인
아이템으로 사랑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패션전문자료사전]
엄마~~ 꼭 <아담스 패밀리>에
나오는 아줌마 같아
그런데 머릿속에서 그려본 것과는 다르게 막상 입어보니 까매도 너~무 까맣기만 했다.
아무리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줘봐도 블랙 원피스 위에 블랙 블레이져, 내 몸의 2/3가
검은색이다 보니 딸아이는 시커먼 영화 포스터 하나를 검색해서 보여준다.
“켁-”
그 캐릭터는 너무 무섭잖아.
나 하나가 올블랙으로 간다고 해서 즐거운 결혼식 분위기가 다운되겠느냐만은
축하해 주러 가는 자리를 이렇게 어두운 분위기로 갈 수는 없다.
우선 나부터 화사하게 꾸밀 필요가 있다.
그래서 원피스 대신 선택한 옷은 베이지색 슬랙스였다.
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바지가 훨씬 낫네” 라며 표정까지 밝아지는 걸 보면
나한테 바지가 꽤 잘 어울렸었나 보다. 밝은 색이어서 더 낫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앞으로는 바지를 좀 더 많이 입어봐야겠는걸?
이런 날은 다른 하객들의 옷은 물론 들고 있는 가방에 신발까지 보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내가 분위기에 맞게 잘 입고 왔는지 점검하기 위해서 더 그렇게 되는 것 같다.
활동하기 편해서인지 치마보다 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실루엣이 여유로운 슬랙스로도 얼마든지 여성스럽고 우아한 연출이 가능한 걸 보면,
내가 아무리 여성스러운 스타일을 좋아해도 특별한 날에 반드시 치마로 꾸며야만
드레시한 느낌을 주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베이지색 슬랙스를 선택하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에 드는 옷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결혼식은 떠들썩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만족스럽게 끝났으며
고모로써의 포스 넘치던 내 모습도 가족사진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참! "고등학생 하객룩"까지 검색해 가며 코디에 유난히 고민이 많았던 딸은
당당하게 학교 교복을 입고 참석하여 모범생(?) 임을 입증해 줬다.
본인도 만족스러워했으며 예쁜 교복핏으로 학교이름을 드날린 것은 물론이다.
결혼식장이나 예의를 갖추는 자리에 갈 때 각 잡힌 정장으로 블레이저를 많이 입는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도 같다.
아마도 ‘불꽃처럼 빛나는’이라는 어원과 참 잘 어울리는 자리여서가 아닐까?
이제는 잘 차려입고 누군가를 축하할 때는
태양처럼 불타오를 그들을 위해
보트경기를 응원하러 온 관중처럼 함성을 질러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