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BD(리틀 블랙 드레스)
남편이 필요하다는 서류를 내 휴무일에 발급받기로 했기 때문에
아침을 일찌감치 먹은 후 빨래를 널어놓고 서둘러 주민센터로 갔다.
하지만 위임장에 본인 자필서명을 해와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고
지금 내 옆에 남편이 없다면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이런 걸 떼어봤어야 알지~
안 떼어봤어도 미리 인터넷 검색만 해봤다면 알았을 것을..
“ 어차피 위임장 안 써오셨으니까 오늘은 발급이 안 돼요”
담당자의 무서운 답변
“ 네.. 그럼 위임장 양식만 주세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오늘 꼭 인감을 받아놔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내가 지하철로 1시간 걸리는 남편 회사까지 가서 자필위임장을
받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허허-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고 했던가.
나 머리도 안 감고 그냥 이대로 나간다!!
말은 이렇게 했어도 명색이 아내라는 사람이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남편회사 나들이를 이렇게 엉망인 채로 갈 수가 있겠어?
그랬다가 남편회사 동료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뭐 기꺼이 모르는 여자인척
해줄 수는 있지만 조금 전 통화할 때 남편의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기에
(본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귀찮아도 차려입고 가주기로 했다.
휴무일인 데다가 날씨도 꿀꿀해서 집콕하며 놀려고 했는데
끝내 이 인간이 날 강제외출 시키고야 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맛있는 점심이나 사달라고 해야겠다~ 생각하니
계획에도 없던 외출이 설레기까지 했다.
비가 조금씩 뿌리다 말다를 반복하여 더 꿉꿉하고 습한 장마철 날씨.
언제 비가 올지 모르니 달라붙는 바지보다 여유 있는 블랙원피스에 눈이 갔다.
특히 오늘처럼 갑자기 외출하게 됐을 때가 더 그렇다.
시간도 없고 뭘 입을지 고민하기 귀찮은데 단 1초 만에 격식을 갖춘
완벽한 외출복차림으로 변신할 수 있으니까.
휘리릭~
블랙 민소매 원피스 위에 리넨 카디건을 걸치고 젤리슈즈 착장.
장마패션 완성이다!!
짧은 기장의 이브닝 가운 또는 칵테일 드레스의 한 종류이며 흔히 LBD이라는 약칭으로도 불린다.
패션 역사학자들은 코코 샤넬과 장 파투의 1920년대 디자인에서 기원했다고 여긴다.
리틀 블랙 드레스는 수년동안 많은 여성들과 패션 팬들에게서 기본 아이템이자 필수 아이템으로 여겨졌다.
간단하면서도 우아하고, 다른 패션 아이템들과도 잘 어울리며, 편안한 자리이든 격식적인 자리이든
어느 자리에서도 활용 가능했기 때문이다. (참조-위키백과)
한낮에 길 한복판에서 만난 남편이
"어? 집에서 볼 때랑 다르네?"라며 “예쁘다”를 연발했으므로
나는 오늘의 옷 선택이 옳았음에 안도했다.
이 정도 반응이면 회사동료가 아니라 대표님이 지나가도 남편이 자랑스럽게
인사시켜 줄 것만 같았다.
만나자마자 음식을 주문해 놓고 아무 말 없이 위임장 작성하고 있는 모습은
마치 우리가 보험설계사와 고객의 관계처럼 보이는 것 같아서 웃음이 절로 났다.
오랜만에 멋 부리고 나온 내 마음과 다르게 계속 시계를 보던 남편은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나 미팅 있어서 금방 들어가 봐야 돼! 고만 먹어.
커피 사줄게, 얼른 먹고 들어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메밀국수맛을 음미할 여유도 없이,
순식간에 끝낸 외출준비만큼이나 남편회사 앞 점심식사도 이렇게 순삭 돼버렸다.
경험부족으로 인해 생긴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번개처럼 잡힌 남편과의 점심 데이트가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