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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화가 필요해

스니커즈 (Sneakers)

by 아이스블루



눈처럼 하얀 운동화 한 켤레를 샀다.

걷기 운동을 시작했으므로 '워킹'에 최적화된 운동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코앞이 멋진 산책로이고 주변이 녹색으로 둘러싸인 집에 4년 넘게 살면서

그 좋은 조건을 활용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니..

난 단순히 게으를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다.

여태까지는 젊음만 믿고 어떠한 운동도 없이 힘겨운 일상을 버텨왔지만,

점점 관리의 필요성이 느껴질 만큼 내 몸은 저질체력이 되어가고 있다.

비록 집 근처 공원 걷기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운동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니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역시 운동화였다.


이런... 또 필요한 것이 생겨버렸다. 내 불치병은 '도구병'이다.

필요 없다고 다 갖다 버려도 사야 할 것은 자꾸 생긴다.

물욕이 없어졌다고 수선스럽게 떠벌리고 다녀도, 뭐 하나 새로운 일을 하게 되면

언제나 거기에는 물건도 함께 따라온다.

이래서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가 겁이 나지만 이건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니까

현명한 소비를 했다고 말하고 싶다.

좀 구차한 변명 같아 보여도 얇디얇은 밑창을 가진 예쁘기만 한 지금의 스니커즈로

걷기 운동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스니커즈(Sneakers)


밑창이 고무로 된 운동화. 현재는 의미가 변하여서 테니스화와 농구화를 베이스로 한

패션 운동화 전반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어원은 '잠입하다'라는 의미의 Sneak. 스니커즈를 신으면 고무 밑창의 특성상 발소리가

매우 작게 나므로 생긴 별명이다. [나무위키 참조]




출처- unsplash




스니커즈는 그냥 단순히 운동화라고 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깊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디자인과 컬러가 워낙 다양해지기도 했지만 이미 <청바지에는 운동화> <치마에는 구두>와

같이 너무 뻔한 패션 공식들이 무너진 지 오래다.

그러니 스커트의 길이나 디자인에 따라서 어울리는 운동화를 잘 골라만 신는다면

구두와의 조합보다 훨씬 세련되고 패션 고수처럼 보이기까지 하다.

친구도 자주 만나고 더 많이 나가 돌아다닐 때는 왜 이런 꿀조합을 생각해 보지도 못했는지

나의 허접한 패션센스가 너무 한스러울 따름이다.


지금이야 실용적이고 편한 것이 좋아서 거의 매일 운동화를 신고 다니지만,

한창 어리고 멋 부릴 나이에는 키 좀 커 보이겠다고 10cm에 육박하는 굽 높은 구두를

자주 신었던 기억이 난다.

진한 화장이 필요 없었던 깨끗한 피부도 그렇지만 20대의 풋풋한 나이에 청바지에 운동화만

신고 다녀도 참 예뻐 보였을 텐데, 왜 그걸 모르고 어색한 풀 메이크업에 발 건강에도 안 좋은

하이힐을 고집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편한 것을 최우선에 두는 패션을 선택하기로 한건 참 잘한 일인 것 같다.

건강보다 멋 내기가 먼저인 패션은 이미 나에게 의미가 없으므로 걷기 운동을 위해서 구입한

이 운동화는 운동 외에 일상생활에서 더 많이 신게 될 것이다.

이제는 다양한 소재의 아이템을 적절히 조합함으로써 예쁘기만 하고 내 몸을 불편하게 만드는

옷차림을 하지 않기로 했다.

스커트로 여성스럽게 보이고 싶은 날이지만, 치맛자락 잡고 발 빠르게 뛰어다녀도

그것이 운동화를 신은 발이어서 하나도 불편할 것 같지 않다.




어디서 뭘 하든 편한 게 장땡이야~





옷을 잘 입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패피”(패션피플)라는

신조어가 생긴 것은 꽤 오래전이라고 한다.

패피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고, 역시 난 "패션 무식자"가 맞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됐다.

여러 가지 아이템으로 자유롭게 코디를 하고 옷과 신발의 멋진 매칭을 선보이는 그들의

패션 센스를 나도 배우고 싶어졌다.

옷장을 열어보고 갖고 있는 신발들을 훑어보니 특별한 날에 신을 펌프스를 제외하면

모두 굽 낮은 신발이나 운동화가 대부분이었고 디자인도 평범하고 밋밋해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이렇게 단순하게 생긴 신발이기 때문에 특별할 것 없는 나를 자연스럽게

꾸밀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패션피플이 가지는 매력이 아무리 출중하다 한들 어떻게 내 매력을 남에게서 배울 수 있을까?

무조건 따라 하기보다는 좋은 패션팁을 내 고유의 스타일로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신발장에 굽 낮은 모카신과 편한 운동화들만 존재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요란한 집정리에서도, 분기마다 기부물품 챙길 때도, 스타일 좀 바꿔보겠다고 뜬금없이

쇼핑할 때도 살아남아준 신발들이라면 더 이상 바꿀 필요가 없겠구나 싶다.

이것이 가장 편하게 나를 드러내주는 스타일일 테니까.




출처- unsplash




오늘은 하늘거리는 시폰 스커트에 새로 산 운동화를 신기로 했다.

오~이렇게도 잘 어울리네! 게다가 편하기도 하고...

유튜브에서 틈틈이 패션 코디 영상을 보았기 때문인지 허접한 패션 센스가 그나마 좀

업그레이된 느낌이다.

날씨도 좋으니까 걷기 운동도 할 겸 세 정거장 정도는 걸어서 가도 좋을 것 같다.

치마를 입은 날이라도 발 편한 운동화를 신은 덕분에 이렇게 거르지 않고 운동을 해냈다.

한심한 '도구병'이 있다는 걸 순순히 받아들인 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에

그것을 활용하기로 했다.

비록 하기 싫더라도 사용하는 도구가 예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면 청소도

즐거운 작업이 될 테니까.


운동은 하기 싫다.

거창한 스포츠가 아닌 단순한 걷기 운동도 나한테는 그런 어려운 일이지만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하기로 했다.

약간의 동기부여가 필요한 마음에 쇼핑까지 하는 내가 우습게 보이지만,

운동으로 튼튼한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난다면

지름신이 내린 한심한 행동도 멋지게 포장될 수 있겠지.

drawing by 아이스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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