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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산에서 바다를 만나다

바다의 선물

by 소행성RDY

산으로 향하는 내 배낭엔 언제부터인가 책이 들어있었다. 산에 가면 그늘진 벤치에 앉아 폼나게 읽고 오리라 꿈을 꾼다.


하지만 배낭에 곱게 챙겨 넣은 책은 배낭 가장 깊은 곳으로 밀려나 짐 정리할 때가 되어서야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책 제목은 바뀌는데 한 번을 읽히지 못하고 돌아오는 신세다.


시간과 공간이 허락됨에도 게으른 내 습성이 그때 발동을 했나 보다. 번번이...


평소보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며 또 책을 챙긴다.


"오늘은 꼭!"


결심을 한다.



낙엽이 뒹굴고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드디어 책을 편다.

몇 번만의 시도인지 모르겠다.

시원하다 못해 싸늘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책장을 넘기는 기분이라니, 직접 경험해 봐야 알 수 있는 기쁨이다.


가방에 고이 넣어온 책은

린드버그의 "바다의 선물"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범우사 문고판 전집에 포함되어 있는 책이다.

젊은 시절 참으로 많이 읽었던 문고판에 대한 향수가 있다. 손바닥만하고 얇아서 가방에 넣고 다니기도 좋고 빨리 읽을 수 있지만 명작들이 수두룩하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도 20대에 문고판으로 사서 읽었다. 시내 독립 서점에서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구입한 것이 몇 개월 전인데 이제 읽는다. 향수에 젖다 보니 사설이 길다.


처음 펼친 페이지의 첫 문장을 읽고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생각한다.


산에서 바다의 선물이란 책을 가져온 것도 재미있지만, 바닷가에선 사색도 독서도 집필도 어렵다니...


"어라, 난 지금 산인데?"


반발하듯 혼자 생각하며 피식 웃는다.


'산에서는 사색도, 독서도, 집필도 가능할걸.'


이 여름 산에서 나는 더 깊어졌으니 , 사색의 공이다.

지금 이 순간 한 줄의 문장이 날 것으로 생생하게 들어오니 독서도 그 역할이 가능하다.

음, 집필!

이것은 내가 아직 시도하지 않았기에 일단 보류다.


그러나

왜 어렵다고 했을까 의문이 인다.


첫 문장은 다음을 위한 포석이다.

역시 작가는 낚시질도 잘해야 하고 궁금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맞다.


작가 린드버그가 왜 바닷가에선 이런 행위가 안되는지 설명한 뒷문장을 보면 공감할 수밖에 없다.


".... 정신의 드높은 비상을 즐기기엔 해변은 너무 따뜻하고 축축하고 부드럽다..... 책장은 들추어보게 되지도 않고.... 내동댕이쳐져 있다. 책을 읽는다거나 글을 쓴다는 것은 물론이고 사색에 잠기는 일마저도 불가능하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다..... 말하자면 바다가 그렇게 만든 편편한 해변에 드러누워 그 해변과 하나가 되고 만다."


이러니 어떻게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가방에서 책을 꺼내지 못하고 산에서 머물다 오는 이유도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걷고 오르고 내려가는 모든 행위 안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산이 말하는 소리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온몸의 신경을 활성화시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기분 좋은 신경 씀이겠지.


다음 배낭을 챙길 때도 책은 잊지 않고 챙길 것이다.

시월이 가면 산은 더 추워진다.

내게 허락된 시간을 놓치지 않고

책과 산으로 가을을 물들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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