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는 숨이 막혀. 나는 시원한 마루에 누워야 좀 살 것 같아.
" 할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평생을 시골에서 살아오신 분이었다.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대청마루에 앉아 햇볕을 쬐며 마당을 바라보는 게 하루의 낙이셨다.
마루 끝에 앉아 기지개를 켜며 묵은 공기를 내보내고,
텃밭에서 자라는 상추와 고추를 눈으로 확인하며
"오늘도 잘 컸네" 하시던 그 여유로운 시간.
그런 삶이 할머니에겐 당연한 하루였다.
그러다 어느 날, 서울에 사는 큰아들 댁으로 올라오시게 되었다.
처음엔 병원 검사를 위해 잠깐 머무는 줄 알았지만,
점점 더 자주 피곤해하셨고, 몸에 힘이 빠진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검사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몸속 곳곳에 암이 퍼져 있었고, 병원에서는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전했다.
그 순간부터 가족들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권했지만,
결국 가족은 깊은 고민 끝에 할머니의 바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병원이 아닌 집에서, 서울에 있는 가족의 품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도록 하자고.
그 선택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족은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큰아들과 며느리는 자신들의 일상과 삶을 조금씩 뒤로 미루고 할머니 곁을 지켰다.
바쁜 와중에도 함께 밥을 지어 올리고, 조심스레 발소리를 줄이며 낮은 음성으로 안부를 물었다.
딸들도 모두 한 마음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오며 바뀐 생활환경이 할머니에게 낯설지 않도록 애썼고,
집 안의 온기가 식지 않도록 이야기와 손길로 채워갔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방문진료를 위해 댁을 찾았다가 조금 낯선 장면을 마주했다.
할머니는 거실 바닥에 누워 계셨다.
곁에는 의료용 침대가 있었지만, 굳이 바닥에 몸을 누이신 것이었다.
곧이어 며느리가 망설이며 말했다.
"어머니는 종종 복도 끝 창가에 앉아 밖을 보셨어요. 이 집에는 대청마루가 없으니까요."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문득, 할머니의 시선을 따라 마루 끝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시골집의 대청마루. 그 앞에 놓인 항아리와 장독대, 멀리 보이는 나무 그늘과 푸른 하늘.
그 장면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가족에게 부탁해 할머니가 시골집 마당 앞 대청마루에 서 계시던 사진을 찾아 인화해 드렸다.
가족은 서둘러 옛 사진첩을 뒤졌고,
며느리는 흐릿한 필름을 손으로 털어내며 "이게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자리예요." 하며 사진을 건넸다.
그날,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여기 옆에 누워봐요. 같이 봐요, 우리 마루.
" 나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자리를 잡고 그 사진을 함께 바라보았다.
우리 앞에는 아무 말도 없이 작은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는 생전 환하게 웃고 계신 할머니 모습이 있었다.
햇살 아래 앉아 마당을 보던 그 표정. 고요한 행복이 스며 있었다.
며칠 후, 할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마루가 없는 서울의 집에서, 그러나 사진 속 마루를 바라보며 바람결처럼 조용히 떠나셨다.
하지만 그 마무리는 평탄하지 않았다.
원래는 재택의료팀의 사망 소견과 함께 가족이 준비한 장례 절차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가족은 모든 절차를 미리 확인했고, 의료진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장례식장 직원이 "119와 경찰을 불러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의료진 소견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예정된 죽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 조사가 필요하다고 고집했다.
현장은 혼란스러워졌다.
할머니가 편안하게 떠나시길 바랐던 가족과 의료진의 바람은 절차적 혼란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눈물과 당황스러움 속에서 가족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누구도 큰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그날 밤의 피로와 아쉬움은 모두의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가족은 준비되어 있었다. 할머니도 준비되어 계셨다.
우리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도는, 그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사람이 죽는다는 건, 그저 한 사람의 생이 끝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그 사람의 삶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그 마지막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사회 전체의 태도이자 철학이다.
할머니가 누워 계시던 바닥, 우리가 함께 바라보던 사진, 그리고 그날 저녁의 쓸쓸한 혼란.
대청마루는 있었지만, 대청마루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가정 내 임종이 가능해지기 위해선 마음만으로는 안 된다.
사랑과 의지만으로는, 제도의 벽을 넘기 어렵다.
법과 제도가, 감정을 따라올 수 있어야 한다.
제도가 삶의 끝자락에서 존엄을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이 정책과 제도 안에서도 반영될 수 있도록 계속 이야기하는 것.
나는 그날 이후로 더 많은 이들의 '대청마루'를 지켜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도 다시 묻는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누워 있고 싶은 자리는 어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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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메시지 999》는
고독사와 가정 내 임종을 둘러싼
작은 신호들과 놓쳐버린 이야기들을 기록한 에세이입니다.
간호사이자 사회복지사로 15년을 살아오며,
삶의 마지막 곁을 지키려 애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일상 속 이야기와 활동 후기는 블로그에서 함께 나누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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