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춘 남자

by 문득

오후 1시, 강남역 한복판


숨막히는 인파 속,

서늘한 속옷 차림의 한 남자가

무언가에 쫓기듯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거리 한복판에 갑자기 멈춰선 그는

초점 없이 충혈된 눈으로 허공에 외쳤다.


“열 시간! 열 시간 뒤면, 돌이 눈을 뜬다!!

세상은 이제 끝장이야!!

하늘은 무너지고, 도시는 잿더미로 변하고,

사람들은 짐승처럼 날뛰다, 불에 타 사라지겠지!!

하하하하!!! 내가 봤어!

불바다 속, 고통과 절규에 뒤엉킨

그 지옥 같은 세상을!!!”


숨이 끊어질 듯 쏟아낸 말 끝에,

그는 시뻘겋게 응고된 액체 덩어리를

토하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얼굴엔 핏기가 사라졌고,

몸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사람들은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고,

몇몇 사람들은 핸드폰을 꺼내 미친듯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강남역에 또 예언자가 떴어!”

“10시간 뒤면 지구가 멸망한대!”


그 순간,

한적한 골목 뒤켠에서 낮게 속삭이는

인터폰 소리.


“강남역 4번 출구,

키 180cm 예언자 출현,

10시간 마크“


검은 점퍼를 입은 남자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의 목덜미엔 고대의 상징처럼 생긴 눈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단순한 장식용이 아니었다.

‘호루스의 눈’

모든 것을 꿰뚫고, 숨겨진 것을 파헤치는 ‘감시자의 눈’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스톤헌터’라고 불렀다.

‘그 돌’에 감응하며 돌을 쫓는 인간 병기들...


몇 년 전,

‘그 돌’에 사로잡힌 한 예언자가 처음 나타났다.

그는 ‘그 돌’이 이 세계를 고통과 절망 뿐인

지옥불로 쳐넣을 거라고 말했다.

모두가 비웃었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이 모든 혼란은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 없었다.


그 뒤로 셀 수 없이 많은 예언자와 스톤헌터들이

바이러스처럼 세계 곳곳에 퍼져나갔다.

그들이 쫓는 건 단 하나.

이 세상의 운명을 좌우할,

‘그 돌’이었다.


거리 한편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웬 검은 망토를 입은 신사가 조용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한 채,

초조한 듯 목덜미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뒤에,

검은 점퍼를 입은 남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망토 신사의 주위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음... 느껴져... 이상한 기운이..”


그는 숨겨둔 은빛 단검을 꺼내 들더니,

광기 어린 눈으로 몸을 비틀며

망토 신사를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하지만, 그의 단검보다 빨랐던 건-

한 남자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전기충격기였다.


스톤헌터는 몸을 부르르 떨며 그자리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손에 있던 인터폰이 지지직거리며 떨어졌다.


“이런 망할 저주받은 인간들 같으니. 썩 꺼져버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그 남자는

쓰러진 스톤헌터의 면상에 침을 퉤- 뱉었다.


망토 신사는 당황한 기색도 잠시,

그 남자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걱정이 한가득 베어 있는 선량한 눈빛,

그리고 목덜미에 도드라진 점 세 개.


“형씨, 괜찮아요?”


남자가 먼저 망토 신사의 안부를 물었다.


“아... 네.. 괜찮습니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술이나 한잔 사주쇼.

시간이 남아도는 백수라서...”


그들은 별 고민 없이 근처에 있는

펍으로 들어갔다.


점심 시간이 끝날 무렵, 펍 내부는 한산했다.

그들은 나무 테이블과 인조 야자수가 있는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거품 가득한 생맥주 두 잔이 바로 올라왔다.


“경황이 없어서 내 소개를 못했네.

강태하라고 하오.

형씨 이름은 뭐요?”


“류길재라고 합니다.”


“류길재? 이름도 참 고풍스럽구먼.”


태하가 망토 차림의 길재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당신은 저 미치광이들의

말을 믿소?”


“글쎄요..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돌이 깨어나 세상을 파괴한다고?

나 참, 세상에 그런 돌이 어딨어?

요즘 보면 세상이 정말 미쳐가고 있는 것 같다니까.”


태하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설사 있다고 쳐요.

그 돌을 손에 넣어서 뭘 어쩌려고?

이 위대한 지구의 독재자라도 되시려고?

난 내 딸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 사람이오.

돌이 깬다느니, 돌을 쫓는다느니,

이런 허무맹랑한 얘긴 이제 듣기도 싫다고.”


“아.. 따님이 계셨군요.”


길재가 조용히 미소지었다.


“6살. 세상 모든 귀여움을 가진 아이지.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보름달이 눈부시게 빛나더군.

그래서 이름을 ‘루나’라고 지었어.”


“따님을 정말 사랑하시는 것 같아요.”


“그 아인 내 인생의 전부니까..”


태하는 조용히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눈가엔 미세한 떨림...

그의 눈이 촉촉해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


“사실 얼마 전 오래 다니던 회사에서 잘렸어.

여기 강남에서 제일 큰 회사 알지?”


길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허, 이 젊은이가 패션 감각만 떨어지는게 아니었네.

‘넥소랩’이라는 회사에서 20년 간

무인 비행체인 ‘쏘서’를 개발했었지.

한땐 정말 잘 나갔어.

출근길에 사람들이 날 보면 인사하기 바빴지.

박사님, 박사님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단 한번의 실수가 대규모 리콜사태로 이어졌고...

난 결국 해고당했지.”


“저런.. 상심이 크시겠군요.”


“나보다 내 딸이 더 걱정이야.

저 녀석 대학 갈 때까진 회사에 붙어있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태하가 허무한듯 김빠진 맥주잔을

휘익- 돌리며 말했다.


“하...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뭐든 잘 할 자신이 있는데 말이야.”


시종일관 침착하던 길재의 눈빛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정말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하시겠습니까?"


‘뭐야, 이 자식도 또라이 아냐?’


태하는 심기가 불편해진 듯

일부러 헛기침을 몇번 했다.


"크흠.. 난 좀 현실주의자라서 말야.

그런 상상을 해보진 않았네.

하지만 내가 정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뭐든 못하겠나?

난 내 딸에게 항상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네.”


"지금 그 말에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태하가 참다 못해 맥주잔을 테이블에 쿵- 내리치며 말했다.


"에이, 이 사람. 지금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거야?

당신이 뭐 회장 아들이라도 돼?

왜 시덥지 않은 얘길 계속 하는거지?

이상한 얘기 할 거면 딴 사람 알아보게."


그때였다.

길재의 눈빛이 번뜩이며,

자신의 목덜미에 있는 무언가를

쓰윽- 한번 쓸어내리자-


테라스 앞을 분주히 지나가는 사람들,

도로 위를 쌩쌩 달리는 차들,

도시의 시끄러운 소음이 한순간에-

마법처럼 멈춰버렸다.


멈춰버린 세상 속,

유일하게 숨쉬고 있는 건

태하와 길재,

단 둘 뿐이었다.


"오, 맙소사!"


태하의 탄식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멈춘 시간 속-

살아있는 건 당신과 나,

오직 둘 뿐이죠.”


“뭐라고?

당신, 정체가 뭐야?”


“그건 차차 알게 되실 겁니다.”


“당신이 한 짓이야?”


길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멈춘 시간 속, 그의 망토 속 목걸이만

유일하게 빛나고 있었다.


은빛 목줄엔 티타늄 계열의

정팔면체 팬던트가 걸려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광채가 맴돌았다.


"과거나 미래로도 갈 수 있죠.

원하신다면..."


길재가 다시 한번 목걸이를 쓸어내리자

멈춰있던 사람들과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꿈이라기엔 이 모든 게 너무나도 생생했다.


태하는 발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것도,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식은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는 것도,

너무나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왜 시간을 멈춘거지?"


"현실주의자라고 하셨잖아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믿지 않으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 무슨 얘길 하고 싶은건데?”


“제가 당신을 과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단 한번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드리죠.”


태하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은 반쯤 열린 채 얼어붙었다.


“진.. 진심이야? 나야 고맙긴 한데..

왜 나한테 이런 호의를 베푸는거지?

내가 자네 생명의 은인이라서?”


“당신이라면 시간여행이

아깝지 않을거라 생각했죠.

그리고, 당신은 그 누구보다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위대한 힘? 내가?”


태하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길재가 묘한 미소를 띤 채 고개만 끄덕였다.


“단, 시간여행이 끝나면

저와 함께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 일이든 하겠다고 약속해주신다면

당신을, 지금 바로 과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태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짐을 싸들고 회사에서 나오던 날,

언제나 그렇듯 환한 미소로 맞아준

사랑스러운 딸 루나.

그 아이의 해맑은 미소.

그가 죽기 전까지 지키고 싶은,

마지막 삶의 이유였다.


“약속하겠소.

그런데 내가 과거로 가면

내 딸은 어떻게 되는 거지?”


“따님이 태어나기 전으로만 가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럼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태하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검은 점퍼를 입은 두 명의 남자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한 명은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인터폰이었다.


길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다급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태하 씨, 결정하셨으면 빨리 진행하시죠.

언제로 보내드리는게 좋을까요?”


태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쏘서-5를 출시하기 전?

이왕 가는 김에 더 과거로?

루나가 태어나기 전만 아니면 되는거잖아.’


태하는 결정했다.


“5년 전으로 가겠소.”


하지만 길재의 시선은 아까부터 계속

두 남자들을 향해 있었다.

그들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네네.. 선택 잘 하셨습니다.

6년 전이라고 하셨죠?

그럼 행운을 빌겠습니다, 강태하 씨.”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태하가 뭐라고 반박할 새도 없이,

그는 머나먼 시간의 터널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태하가 사라진 자리에 홀로 남은 길재.

그는 두 남자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런...’


그는 재빨리 목걸이를 두 번 쓸어내렸다.


남자들이 그들이 있던 곳에 들이닥쳤을 땐,

김빠진 생맥주 두 잔만이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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