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전의 서막

by 문득

다시 돌아온 한국,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서울의 밤거리엔

여느때처럼 피곤에 찌든 직장인들과

우스꽝스런 한글이 적힌 단체복을 입은 배낭여행객 무리,

학원 셔틀을 돌고 있는 무표정한 교복 차림의 학생들로

여전히 북적이고 있었다.


마치, 태하를 둘러싼 이 모든 급박한 상황들이

이들에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양,

모든 건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제 돌이 깨기까지는, 단 5시간.

오직 그뿐이었다.


“프랑스까지 따라오다니...

지독한 놈들.”


태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저들은 전세계에 깔린 감시망으로

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우리가 돌을 갖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신이 그 목걸이를 한번만 쓸어내리면

바로 노들섬으로 갈 수 있는 거 아니오?”


“아까 앙투안의 얘기 못들으셨습니까?

노들섬 요정의 방어막엔 시간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요.

마법을 쓰지 않고, 우리 힘으로 가야 합니다.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럼 일단, 우리 회사로 갑시다.

아직은 내가 대표니까,

업무용 쏘서 몇 대쯤 빼내는 거야

일도 아니지.”


다음 순간, 그들은 넥소랩 본사 앞에 서 있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각, 어둠에 잠긴 건물들 사이로

드문드문 켜진 사무실 불빛만이 조용히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자, 들어갑시다.”


로비 입구에 들어서자,

때마침 야간 순찰을 돌고 있던 경비원과 눈이 마주쳤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퇴근하신 줄 알았는데, 회사엔 무슨 일로...”


“아.. 좀 볼 일이 있어서 왔네.

금방 처리하고 갈테니 신경쓰지 말고 볼일 보게.”


두 사람은 경비원을 그대로 지나쳐,

쏜살같이 로비 건너편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원은 태하를 향해 조용히 목례를 한 뒤,

두 사람이 사라진 엘리베이터 쪽을 유심히 지켜봤다.

엘리베이터 위 숫자가 하나씩 올라가더니,

31에서 멈췄다.


그의 입꼬리 한쪽이 살며시 올라가더니,

이내 누군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스톤 캐리어 포착.

강태하와 초능력 남성 한 명.

넥소랩 본사로 진입한 뒤, 31층 쏘서 대여소로 이동.”


그는 단추를 거칠게 풀어헤치더니

근무복을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바로 그때, 목덜미 위로 새겨진 검은 문신 하나가

싸늘하게 드러났다.


태하와 길재는 숨 가쁘게 대여소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선 직원 한 명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대표님!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그는 태하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시선은 자연스레 옆에 있는

긴 망토 차림의 길재에게 향했다.


“아.. 이 사람은 내 친구...

아니, 친한 동생이야.”


“류길재라고 합니다.”


길재가 머쓱한 듯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동생이 신형 쏘서를 한번 타보고 싶다고 해서 말야.

혹시, 가능할까...?”


“네, 물론이죠. 몇 대 필요하세요?

한 대? 두 대?”


“음.. 한 서른 대쯤?”


직원의 손이 순간 멈칫했지만,

다행히 추가 질문은 없었다.

태하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직원이 쏘서를 정비하는 동안,

태하는 무심코 그가 정리하던 짐더미를 힐끗 쳐다봤다.

그런데 그 안에-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한 여자아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 여자 아이는 분명 루나였다.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 눈빛과 표정,,

심지어 자신과 꼭 닮은 목덜미의 점 세 개까지도

모두 똑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태하는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뒤로 조용히 다가온 길재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하 씨...”


루나가 사라진 뒤,

그에겐 무너져가는 시간만이 남아 있었다.

세상 그 누구도 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는 천천히 이 세상과 동떨어진 채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이었다.

만취한 상태로 한강 다리 위를 비틀거리던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긴 벤치 위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땐,

그의 옆자리에 낯선 노인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치 꿈만 같았다, 이 모든 상황이...

그는 마치 태하의 마음을 꿰뚫는 듯한 눈빛으로

어둠 속에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젊으니, 상처가... 아주 깊구먼.

하지만 이젠, 그 아이를 보내줘야 하네.

자네가 붙잡고 있는 건 그 아이가 아니라,

자네 자신의 슬픔일세.”


선지자 같은 그 노인의 한 마디가,

마치 심연 속 울리는 종소리처럼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꿈만 같았던 그날 이후, 그는 버텼다.

루나 없는 삶에 익숙해지려 애쓰며,

그녀를 마음 속에서 놓아주기 위해

쓰라린 하루하루를 견디고, 또 견뎠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이-

사진 한 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렸다.


“이 아이... 내 딸 맞지?”


태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길재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내게서 그리 멀리 떠나진 않았군.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그동안 몰랐다니...”


태하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 한줄기가

조용히 흘러내렸다.


세월이 참 무상했다.

그는 사진 속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속으로 수백 번 되뇌였던 이름을 속삭였다.


“루나...”


어느새 옆에 다가온 직원이

태하의 손에 들린 사진을 힐끗 보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예쁘죠? 제 딸입니다.

아주 똘똘한 녀석이에요.”


“딸 이름이 뭐지?”


“김지우라고 합니다.”


지우.

다른 이름, 다른 가족, 하지만 같은 아이.

태하의 가슴이 다시 무너져내렸다.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게 생긴 아이구먼..”


“엊그제 태어난 것 같은데 벌써 여섯 살이에요.

그 녀석.. 절 참 잘 따르는데,

일이 바쁘단 핑계로 많이 놀아주지도 못했죠.”


직원은 애써 덤덤히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 녀석 생일이에요.

퇴근길에 딸기 케이크라도 하나 사갈려구요.”


그의 눈엔 아이를 향한 깊은 사랑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애틋함이 서려 있었다.


“혹시, 자네 이름이 뭔가?”


태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총무팀 김도현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태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늘 해고 명단에서 봤던 이름이었다.


“오늘... 자네 마지막 날이지?”


태하의 물음에 도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20년 넘게 다닌 회사인데,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좀 얼떨떨하네요.”


“나도 그 기분... 잘 알아.”


“대표님이요?”

도현의 의아한 표정에

태하는 곧 차분히 옛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 회사의 대표가 되기 전에,

내게도 꽤 많은 일들이 있었지.”


“아 그렇군요..”


“딸에겐 아직 말 안했지?”


“네. 아직 아빠가 회사를 다닌다는 것도 잘 몰라요.

불쌍한 우리 딸...

못난 아빠를 만나 하고 싶은 것도 다 못하고...”


그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그의 등 뒤로, 6년 전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 하나만을 위해 버티던 그 시절.

그 무게가 얼마나 고된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울컥-

순간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올랐다.


“오늘 해고된 건 자네 탓이 아니야.”


“위로 안 해주셔도 됩니다.

저도 제가 부족한 거 잘 알고 있거든요.

20년 넘게 창고 정리만 했죠.

사람들이 절 보고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전 할 말이 없는 걸요...”


그의 말에 태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오해야.

자넨 능력이 부족해서

해고당한 게 아니란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자네가 비밀리에 노조설립을 추진한 사실이

회장 귀에 들어간 것 같네.

회장은 발뺌하고 있지만,

분명 이번 일로 자네와 동료들을

해고시킨 게 분명해.

내가 이번에 억울하게 해고당한

직원들을 반드시 복직시킬테니

희망을 잃지 말게.”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도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자네 딸을 봐서라도,

이대로 무너지면 안돼.

잠시 쉬어간다 생각하게.

내가 반드시 자넬 다시 부를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표님....!”


도현은 끝내 참았던 서러움에 목이 메인 채,

꺼억꺼억 울음을 쏟아냈다.


태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조용히 감싸 안았다.


잠시 후-

도현이 쏘서 정비를 마치고

두 사람을 불렀다.


“대표님, 쏘서 서른 대

가동 준비 완료됐습니다.”


“수고했네.”


“혹시 동생 분이 직접 조종하실 건가요?”


옆에 있던 길재가 멋쩍은 웃음을 흘리자,

태하가 대신 말을 받았다.


“나랑 동생이 한 대를 타고,

나머지 쏘서들은 자율주행 모드로 따라올 거야.”


“혹시... 어디로 가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좀 먼 곳으로 갈 것 같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아니, 이건 내가 직접 해야 할 일이야.

걱정 말고 어서 퇴근하게. 예쁜 딸이 기다리겠어.”


“넵.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전 이쪽 정리를 좀 더 하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여소 입구가 요란하게 열리더니

수십 명의 스톤헌터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스톤헌터다!

빨리 쏘서에 올라타!”


태하의 외침과 동시에

도현은 반사적으로 옆에 있던 쏘서 안으로 몸을 던졌다.


서른 대의 쏘서에 일제히 불이 켜지며,

곧이어 부르릉-

깊게 깔리는 엔진음과 함께

요란한 부스터 폭음이 밤공기를 갈랐다.


하늘 위에선 다른 무리의 쏘서들이

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들 뒤를 바짝 추격하기 시작했다.


깜짝 비행쇼가 벌어졌다는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너도나도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 장면이-

지옥의 서막일지,

평화의 시작일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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