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장막 속으로

by 문득

“대표님, 무사하십니까?

도대체 저들은 왜 우릴 쫓는 거죠?”


도현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흘러들었다.

잔뜩 긴장한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태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숨길 수 있는 것도,

숨겨야 할 이유도 없었다.


“우리에겐... 저들이 목숨 걸고 쫓는 물건이 있어.”


“설마.. ‘그 돌’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나도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이건, 엄연한 현실이야.

이제 3시간 뒤면 이 돌이 깨어날거야.

그 전에 반드시 감춰야 해.

그 누구도 찾지 못할 곳에...”


“그게... 대체 어디죠?”


“전설 속 노들섬, 바로 그곳이지.”


무전기 너머로 긴 침묵이 감돌던 그때,

스톤헌터들이 태하의 쏘서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젠장, 이러다간 꼼짝없이 당하겠어.”


태하가 이를 악물었다.


“대표님, 우리 회사에 저런 공격용 쏘서도 있었나요?”


도현의 물음에 태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니. 저건 우리가 만든 게 아니야.

누군가 저들을 돕고있는 게 분명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얼굴이 있었지만,

지금은 의심보단 생존이 우선이었다.


“일단, 조종석 왼편, 사이드 패널의 커버를 열어봐.

붉은 C버튼이 보일 거야. 누르게.”


둘이 동시에 버튼을 누르자,

삼십 대의 쏘서가 순식간에 밤하늘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와... 이건 진짜 처음 보는 기능인데요.”


도현이 숨을 죽이며 감탄했다.


“카멜레온 모드야.

주변 색에 동화되어 쏘서를 위장시키는 기능이지..

안전 문제 때문에 상용화는 못했지만...

업무용 쏘서엔 몰래 달아놨지.

설마 이렇게 쓸 날이 올 줄이야...”


쏘서들이 그림자처럼 사라지자,

스톤헌터들의 공격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저들을 따돌릴 때까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지금이다. 최대 속도로 상승한다!”


태하의 외침과 함께

쏘서들은 마치 화살처럼 밤하늘을 솟구쳐 올랐다.

순식간에 고모 10,000미터를 돌파했다.


"대표님의 비행실력은 여전하십니다.

이제 저놈들도 우릴 따라잡진 못하겠죠.”


하지만 그 순간-

그들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거대한 구름떼였다.

카멜레온 모드도 무력해지는 구간이었다.


“이런...!”


속도를 줄일 틈도 없이,

서른 대의 쏘서가 그대로 구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쏘서들이 다시 형체를 드러내자,

이를 눈치 챈 스톤헌터들이 다시 포격을 퍼부었다.

그 사이, 쏘서 두 대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이어지는 폭발음과 함께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제길! 이렇게 가다간 우린 전멸이야!”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태하는 조종석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눈 앞에서 자신의 쏘서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길재가 망토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여기, 앙투안이 준 행운초의 물방울이에요.

한번 드셔보세요.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손바닥 위 작은 유리병 안에서

푸르스름한 액체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태하는 주저 없이 병뚜껑을 열어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이상한 직감 하나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북쪽으로 가야할 것 같아.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느낌이 그래."


“북쪽이요? 거긴 노들섬이랑 완전히 반대 방향인데요.”


"알아. 하지만 지금은 그쪽 말고는 떠오르는 곳이 없어."


"좋습니다. 행운초를 한번 믿어보죠."


태하가 조종간을 북쪽으로 틀자,

스톤헌터들도 망설임 없이 그들 뒤를 따라붙었다.


그들이 비행하는 곳은,

지도 상으로도 표시되지 않은 망망대해였다.

그때, 계기판에 붉은 경고등이 번쩍였다.


“돌풍 위험 지역 진입.”


경고음과 동시에

쏘서가 격력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들 앞으로, 회오리 지대가 무섭게 다가오고 있었다.


“으악! 고도를 높여! 지금 당장!!”


태하가 조종간을 힘껏 당기며 쏘서를 끌어올리자,

도현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기체는 미친 듯이 흔들렸고,

창밖은 소용돌이치는 바람과 구름으로 뒤엉켜있었다.


태하의 쏘서들은 맹렬한 상승 속도로

강풍을 뚫고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 사이, 강풍 지대에 갇힌 스톤헌터들의 쏘서는

거센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거나

추진력을 잃고 바다로 추락하고 있었다.


“도현 씨, 괜찮아요?”


한동안 조용했던 무전기 너머,

잠시 뒤 들려온 도현의 거친 숨소리가

태하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네, 대표님. 무사합니다.

하아... 저놈들, 정말 끈질기네요.

그 돌 하나에 왜 저렇게들 미쳐있는 거죠?”


“그러게 말이야. 나도 묻고 싶어.

대체 이 돌로 뭘 하겠다고 저렇게 날뛰는 건지.”


태하는 씁쓸한 한숨을 내쉬며

쏘서를 다시 남쪽으로 틀었다.


잠시동안의 정적 속,

길재가 계기판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제 노들섬까지,

딱 한 시간 남았습니다.”


“잔여 연료 다 태워.

이제 최대 속도로 간다!”


태하의 말이 떨어지자

쏘서들의 엔진이 붉게 달아올랐고,

공기를 가르는 듯한 굉음과 함께

광란의 질주가 시작됐다.


질서정연한 대열 속,

한 쏘서의 통신이 갑자기 끊기더니

계기판에 그 존재마저 사라졌다.


“이건 또... 뭐야...?”


태하의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

어디선가 정체불명의 포탄 하나가 날아들었다.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뒤따르던 쏘서 한 대가 산산조각 나며

공중에서 폭발했다.


“안돼!!!!!!!!!!!!!!!!!!!”


태하는 반사적으로 무전기를 잡아

도현의 이름을 외쳤다.


“도현 씨! 응답해요! 살아있죠?!”


무전 너머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현 씨!! 말 좀 해봐요!!

살아 있는 거죠?!

대답 좀 해보라구요!! 제발!!!”


그의 절규는 허공을 맴돌 뿐,

어떠한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곧이어 계기판에 붉은 문구가 떠올랐다.


“2번 쏘서 추락.”


도현의 쏘서였다.

태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숨이 턱 막히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조종간에서 손을 뗐다.

슬픔과 절망이 가슴을 짓눌렀다.


눈물은 멈출 줄 몰랐고,

두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그 어떤 말도, 위로도 닿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길재가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이미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운명이란...

당신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도현 씨의 딸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제 당신은 루나와 지우를 위해

그리고 아직 이 세상에 희망을 품고 사는 이들을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 말에, 태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겁고 단단한 무언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조종간을 다시 움켜쥐었다.


"그래... 이 더러운 세상.

누가 끝까지 버티는지, 두고 보자고.”


그 순간,

태하와 길재가 탄 쏘서에도

탄환들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쏘서의 외벽이 진동했고,

계기판에선 끊임없이 경고음이 울렸다.


“노들섬까지 이제 5분도 안남았소!

이대로 있다간 우리 쏘서도 얼마 못 버틴다고!

시간을 멈춥시다!”


태하의 외침에, 길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망토 안쪽을 더듬어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부드럽게 표면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

쏘서와 날아들던 총알들,

폭발과 불길, 튕겨나간 파편들까지

모든 것이 정지된 한 장면처럼 멈춰섰다.


시간이 멈췄다.


길재는 조심스럽게

목걸이 안에 봉인되어 있던 ‘그 돌’을 꺼냈다.

겉보기엔 그저 작은 회생 돌멩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돌은 살아있는 생명처럼 강렬한 빛을 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돌이 반응하고 있어요.

이건 분명 기억의 장막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입니다.”


“이제 남은 건...

이 돌을 들고 장막 속으로 뛰어드는 것 뿐이군.”


태하가 돌을 응시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길재는 그런 태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혼자 가도.. 괜찮겠어요?”


“걱정말게. 아무 일 없을 거야.

이 돌을 요정들에게 맡기고,

꼭 다시 돌아오겠네.”


태하는 쏘서의 문 앞에 홀로 섰다.

단호한 그의 표정엔, 굳은 결의가 서려있었다.


“태하 씨, 전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태하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손엔 ‘돌’을,

다른 손엔 소중한 이들의 기억을 품은 채

장막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윽고-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쏘서를 향해 날아들던 탄환들이

허공을 가르며 쏘서에 박혔고,

산산이 부서진 기체들은 연기와 불길 속에 휩싸였다.


하늘은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중 일부 스톤헌터들은

태하를 쫓아 장막 안으로 뛰어들었지만-


파지직!


투명한 장막에 닿는 순간

그들은 산산조각 나거나

투명막에 튕겨나가듯 나가 떨어져

얼음장 같은 밤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던 하늘 위 소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고..

바다는 모든 흔적을 삼킨 채

다시 깊고 고요한 침묵에 잠겼다.


길재는 조종석에 앉은 채,

태하가 사라진 장막 너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제발... 무사히 돌아와요, 태하 씨.’


그날 이후,

길재는 하루 이틀...

그리고 점점 시간의 흐름마저 잊은 채

그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끝내-

태하는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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