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셀리앙드의 연금술사

by 문득

태하와 길재가 도착한 곳은

녹음이 짙게 깔린 어느 이국적인 숲이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숲은 그 시간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익숙한 어둠과 일렁이는 안개 속에

오래도록 침잠해있었다.


자작나무와 너도밤나무 같은 수천년 된 고목들이

신령들처럼 우뚝 솟아 있었고,

이끼류는 음습한 기운을 머금은 채

대지 위를 촘촘히 뒤덮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태하는 숲의 이질적인 기운에 잠시 넋이 나간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프랑스 남부, 브로셀리앙드 숲입니다.

멀린과 아서왕의 신화가 깃든, 영험한 숲이죠.”


“거 참, 멀리도 왔군.

여긴 왜 온 거지?”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저기 집이 보이시나요?”


하지만 길재가 가리킨 곳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집 혹은 그와 비슷한 형체조차 보이지 않았다.


길재는 긴 망토를 땅바닥에 늘어뜨린 채

맨발로 대지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발길이 멈춘 곳엔 나무와 수풀에 가려진

작은 오두막 하나가 숨겨져있었다.


담쟁이덩굴에 점령당한 문은

누군가 드나들던 흔적조차 아득히 느껴질 만큼

굳게 잠겨 있었다.


태하가 별 생각 없이 담쟁이덩굴을 떼어내려 하자,

시종일관 점잖게 뒤로 물러나 있던 길재가

그의 손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안 됩니다!

이 숲은 자연을 거스르는 자를 응징할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태하는 길재의 말을 흘려넘긴채,

문고리에 달라붙은 억센 담쟁이덩굴 한 줄기와

한바탕 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순간, 담쟁이줄기가 날카로운 채찍으로 변하더니

태하의 손등을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의 손엔 선명한 핏자국과 얼얼한 통증이

고스란히 남았다.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아요.

이 숲은 인간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구요.

앞으론 제 말 잘 들으실거죠?”


태하는 반쯤 울상이 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뉘 계신가요?

저는 한국에서 온 류길재라고 합니다.

앙투안 브로셀리앙드를 만나러 먼 길을 찾아왔으니,

부디 제게 이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잠시 후, 문을 감싸던 담쟁이덩굴들이 사사삭-

소리를 내며 얽히고설킨 줄기들을 스스로 풀어내더니,

이윽고 문이 스스로 열리기 시작했다.


태하는 입이 벌어진 채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도 안돼...”


집 안은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작고 초라해 보였다.

천장이 낮아 구부정하게 서도 머리가 닿을 듯 했고,

나무와 돌을 깎아 엉성하게 만든 가구들 사이로

반딧불이 램프 하나가 어스름한 실내를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그때, 어두운 적막을 깨는 틱틱- 소리.

탁자 위 작은 투명 상자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속엔 성에가 뿌옇게 껴있었고,

작은 얼음 조각들이 둥둥 떠다녔다.

그 위로 눈깜짝할 새 움직이는, 형체조차 흐린 무언가.


“움직여... 이 조그만 것들이...

도대체 정체가 뭘까?“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상자 속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태하의 모습에, 길재는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요정 처음 보시죠?

세상에서 제일 작은 요정,

북극에서 온 ‘피코’예요.

집주인의 취향을 대충 아시겠죠?”


“살면서 요정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태하는 요정들을 놓칠 새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대로 멈춰있었다.


그때-

그들 뒤에서,

누군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Qui êtes-vous?”

(당신은 누구죠?)


자작나무 장롱 뒤에 숨어서 이들을 지켜보던 이는,

달팽이관이 보일 정도로 뾰족한 귀에

지혜와 총명함이 묻어있는 초록빛 눈망울,

귀여운 날개가 살포시 접힌 꼬마 요정이었다.


갈색 머리칼을 양갈래로 땋은 그녀는

날 선 눈빛으로 태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태하가 조심스럽게 먼저 입을 열었다.


“넌 누구야? 귀엽게 생겼구나.

하지만 이를 어쩌나.. 아저씬 불어를 못하는데...”


그러자 그녀가 작은 손바닥을 허공에 펼치더니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FRIDA, ARRET! Il est avec nous!”

(프리다 멈춰! 저 분은 우리 편이라구!)


그녀는 순간 멈칫하며 손을 내렸지만

아직도 두 손엔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그때, 귀여운 산토끼가 그려진 쟁반 위에

찻잔을 든 한 사내가 그들을 향해 허둥지둥 달려왔다.


“아이쿠! 초면에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 아이는 프리다예요. 숲의 요정이죠.

인간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주세요.”


그는 프리다를 대신해 태하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길재는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하하, 당신도 인간 아닌가요?”


사내는 실실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가끔 제가 인간이란 걸

깜빡할 때가 있단 말이죠.”


‘보기와는 다르게 예의 바른 청년이군.’


태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사내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전 앙투안 브로셀리앙드라고 합니다.

숲의 연금술사이자, 요정의 수호자이죠.”


150 남짓의 키에 헝클어진 머리,

나뭇잎을 엮어 만든 초록 모자를 눌러쓴 사내.

오래된 식탁보처럼 헐렁한 바지에

나무껍질로 된 허리끈을 엉성하게 두른 모습이

흡사 숲 속 난쟁이같아 보였다.


그는 어릴 적, 이 숲에서 길을 잃고 맹수에게 쫓기던 중

요정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매일같이 숲을 찾아와

요정의 언어를 따라하고, 그들의 몸짓을 흉내내며,

조금씩 요정의 세상으로 스며들어갔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앙투안은 요정들과 함께 노닐던 이 작은 오두막에 정착했고,

지금까지 요정과 약초를 연구하며 살고 있었다.


“마법사님이랑 같이 오신 거 맞죠?

혹시, 친구 분이신가요?”


“강태하라고 하오.

낯선 이 곳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왔소.

친구는 아니고 동업자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오.”


“하하, 마법사님도 참...

어떻게 매번 이렇게 비관적이고 무뚝뚝한 분들만

데려오시는지...”


태하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대놓고 무안을 주다니...


“지금, 날 대놓고 흉보는 거요?”


“앗! 절대 그런 게 아니예요.

비관적이고 무뚝뚝한 게 꼭 나쁜 건 아니잖아요.

전 단지, 마법사님의 한결같은 취향이 너무 신기할 따름이에요.”


이가 다 보일 정도로 해맑은 웃는 그의 모습에

태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이, 앙투안은 태하의 손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앗! 설마.. 담쟁이덩굴에게 당하신 건가요?”


태하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문 앞에 경고문이라도 붙여놓으시지...

하마터면 정말 큰 일 날 뻔 했지 뭐요.”


“마법사님이 별 말씀 안 하시던가요?”


그러자 태하가 길재를 힐끔 쳐다보며 헛기침을 했다.


“글쎄, 내 평생 이런 괴짜같은 사람은 처음이라...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에헴-”


“헤헤- 마법사님을 괴짜라고 부르는 사람은

태하 씨 밖에 없을 거예요.”


태하는 이들 사이에 계속 있으면,

자신이 더 이상해질 지도 모른다는 걱정 마저 들기 시작했다.


“상처는.. 걱정마세요.

제게도 늘 있는 일이거든요.

저도 성질이 좀 급한 편이라.. 헤헤.”


앙투안의 손은 정말 상처와 멍 투성이였다.


“엘노아 잎을 좀 가져올게요.

그걸 잠시만 얹고 있으면 상처가 금방 아물 거예요.”


그는 손때 묻은 화강암 절구에 엘노아 잎을 잘게 빻은 뒤,

잎 찌꺼기들을 태하의 손등에 살포시 얹어놓았다.

짙은 초록즙이 순식간에 그의 살결 속을 파고들어가더니

벌어진 상처 위를 보드라운 투명막으로 감쌌다.

이윽고 새살이 돋아나듯 상처가 말끔히 아물었다.


“이럴 수가...”


태하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길재를 만난 이후로-

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반백살의 그는, 이 맑고 순수한 영혼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졌다.


한편, 앙투안은 태하 옆에 우두커니 서있는 길재를

유심히 쳐다봤다.

그의 얼굴엔, 알 수 없는 초조와 불안이 만연해있었다.


“마법사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길재의 굳게 다문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앙투안, 이제 10시간 후면

‘그 돌’이 깨어날 거예요.”


“세상에! 이를 어쩐다...

그럼 우린... 모두 죽는 거예요?

요정들은요? 괜찮을까요?”


“지금 요정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에요.

지금은 돌이 시간의 결계 안에 갇혀 있지만,

곧, 결계를 끊고 세상 밖으로 나올 거예요.

이미 스톤헌터들이 돌의 기운을 감지하고

우릴 쫓기 시작했어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돌이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이걸 숨길 만한 곳을 찾아야 해요.

어디가 좋을까요?”


앙투안은 벼락맞은 밤나무 탁자 위에

나뭇잎 모자를 올려놓고는

손가락 끝으로 탁자 위를 톡톡 치며

혼자 중얼이기 시작했다.


“시간의 결계도 끊을 힘이라...

그걸 버틸 만한 곳이

이 세상에 존재하긴 할까요?”


“요정의 방어막도 역부족일 것 같고...”


순간, 길재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요정의 방어막?”


“네, 요정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방어막을 만들어왔어요.

수상한 자가 들어오면 산짐승을 유인해 공격하게 하거나,

길을 잃게 만들어 스스로 도망가게 하기도 하죠.

이 숲 역시 그런 방어막 중 하나구요.

하지만... 완벽하진 않아요.

절대적인 방어막이 아니어서

지속적으로 자극을 받으면 점점 약해지죠.

돌을 완벽히 숨기는 건... 어림도 없어요.”


앙투안의 눈동자가 다시 깊어졌다.

그때,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프리다가

그의 귀에 살며시 무언가를 속삭였다.


“Nymphe de l’île de Nodeul...”

(노들섬의 요정들...)


“맞아. 거기가 있었지.

노들섬!”


앙투안이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외치자,

벽에 걸려있던 반딧불이 램프가 살짝 흔들렸다.


“노들섬이라면... 나도 잘 알지.

요정과 나는 인간, 인간이 함께 살던 아니오?

노들섬의 전설이 탄생한 곳,

다만 그게 전설이 아닌, 실제였다는 사실은,

거의 대부분 모르지만...”


태하가 우쭐거리며 말하는 모습에

길재가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네, 맞아요.

노들섬의 요정이 만든 방어막은,

외부 침입자나 그 어떤 마법으로도 뚫을 수 없는

절대적인 방어막으로 알려져 있어요.

오직 노들섬 요정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우린 그걸 ‘기억의 장막’이라고 부르죠.”


태하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길재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정말 완벽한 장소네요.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거길 들어가냐는 거죠.”


태하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요정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한다...

만약 그들을 잘 아는 요정이 있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어떨지...?”


태하가 조심스럽게 꺼낸 한 마디에

앙투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주 오래 전, 노들섬 요정들과 함께 지낸

북극의 라플란드 요정조차 장막을 통과하지 못했어요.”


그 순간, 길재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 돌을 품고 살아온 시간 동안

확신하게 된 게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이 돌이 사람들의 공포에

강하게 반응한다는 것이죠.


예언자들이나 스톤헌터들이 다가올 때,

전 느낄 수 있었어요.

어둠 속에서,

돌이 심하게 요동치는 것을...


노들섬 요정들이 여전히 돌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이 돌은 그 기억에 반응할 겁니다.

공포도 일종의 기억이니까요.


그렇다면, 이 돌이야말로

기억의 장막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앙투안은 이미 웃고 있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네요.”


모두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때,

프리다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시계를 가리켰다.


“저런, 벌써 3시간이나 지났군.

서둘러 이동해야겠어.”


태하의 말에 길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떠날 채비를 하자,

프리다는 커다란 눈망울로 태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낀 태하는 어느새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프리다라고 했지?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눈도 예쁘고, 코도 오똑하고..

아주 야무지게 생겼구나.”


태하가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아저씨가 지구를 구하고 올 테니까

우리 꼭 다시 만나자.”


프리다는 태하의 목에 있는 점 세 개를

유심히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À bientôt, monsieur!”

(아저씨, 또 만나요!)


“비관적이고 무뚝뚝한 분 치고 이렇게 따뜻한 건 처음 봐요.”


옆에 있던 앙투안이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태하도 이번엔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로 화답했다.


“이거 드릴게요.”


앙투안이 태하에게 조심스레 작은 병 하나를 건넸다.


“행운초의 물방울이에요.

진짜 중요한 순간에 이걸 마시면

행운이 따를 거예요.

부디 무사히 돌아오시길..”


태하와 길재는 앙투안과 프리다의 배웅을 받으며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처음 들어올 때랑은 달리,

숲은 짙은 안개로 자욱이 덮여 있었다.

나뭇잎 하나, 바닥의 이끼 한톨 조차 희미해졌다.


“방향감각이 사라졌어요.

마법을 쓰려면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데...”


길재가 손목시계에 있는 작은 나침반을 들여다보며,

초조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때였다.


안개 속 수풀 어딘가에서 스르륵-

무언가 미세하게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 소리가 잔물결처럼 점차 거세져 갔다.


길재는 태하를 향해 불안한 눈빛을 보냈고,

태하 역시 금방 알아차렸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망설일 틈도 없었다.

길재는 태하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고,

목걸이를 손끝으로 두 번 쓸어내렸다.


시간의 터널이 열리는 찰나-

그들은 보았다.

안개 너머, 검은 실루엣과

칼날처럼 번뜩이는 눈동자들.


스톤헌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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