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시, 강남역 한복판
오늘따라 강남역 주변엔 수상한 자들이 눈에 띄게 많이 보였다.
돌에 사로잡힌 예언자들은 광기 어린 눈빛으로 뭔가를 계속 중얼거렸고,
스톤헌터들은 검은 점퍼 차림으로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거렸다.
태하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은 하나도 안 변했군...’
불현듯 6년 전, 그 때가 떠올랐다.
스톤헌터에게 기습당한 길재를 구해준 뒤,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그가 원한 인생이 아니었다.
단 한 번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던 것 뿐인데,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을까..
‘하... 루나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길재 그 자식은 대체 왜 안 나타나는 거야?
6년 동안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혹시, 자기가 실수한 거 알고 도망친 거 아니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는 땅이 꺼질 듯 긴 한숨을 내뱉으며,
회사로 복귀하는 인파 사이를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아무 생각도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거운 발걸음만 터벅-터벅-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거대한 회색 도시를 가득 메운 백색 소음마저 희미해진
적막과 혼돈, 그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던 그의 그림자는
중심을 잃고 우두커니- 길 한가운데 멈춰섰다.
하지만-
멈춰 선 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옆을 지나던 사람들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있었다.
‘이게, 도대체...’
그는 무심코 예전에 길재와 갔던
테라스 펍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6년 전,
검은 망토 차림의
길재가 서 있었다.
그는 차가 멈춘 대로를 그대로 가로질러
길재에게 달려갔다.
모든 걸 다 잃은 듯 황망한 그의 표정은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길재의 실수였다.
잠시 스톤헌터들에게 한눈을 판 사이
태하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태하가 그의 앞에 다다르자,
그는 흐느끼며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지난 6년 간의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거세게 밀려왔다.
“죄송합니다, 태하씨...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습니다.
전 무능하고, 실패한 마법사입니다...”
태하는 초점 없는 눈으로 길재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 딸은... 어딨소?”
“당신의 딸은...”
길재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더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의 딸로 예쁘게 자라고 있습니다.
원하시면, 어디있는지 알려드릴게요.”
그 말에, 태하는 무너져내릴 듯 가슴이 아려왔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멀리서, 그 아이를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태하는 축 쳐진 눈으로 길재를 바라보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지금 그 아이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다 부질없지...”
그리고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촉촉해진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 한줄기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태하와 길재는,
사진 속 영원히 박제된 장면처럼,
그렇게 한동안을- 아무 말 없이 멈춰 서있었다.
오랜 침묵 끝, 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실수를 한거지?”
“스톤헌터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그만...”
“자넬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6년 전에도 그렇고...
왜 그들이 자네한테 달려드는거지?”
길재는 확실히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결심이 선 듯 조심스레 입을 뗐다.
“못 믿으시겠지만, 저들이 미친듯이 쫓고있는 ‘그 돌’이...
바로 여기에..”
그의 망토 속 목걸이가 반짝였다.
팬던트에선 여전히 신비로운 광채가 돌고 있었다.
“뭐라고?
지금 나보고 ‘그 돌’의 존재를 믿으라는 거야?”
“못 믿으시겠으면 직접 보여드리는 수밖에...
하지만 이 돌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길재가 목걸이에 달린 팬던트를 여는 시늉을 하자
태하가 황급히 손사레를 쳤다.
“당장 그만둬.
무슨 말인지 알겠어.
참나, 내가 돌을 믿게 될 줄이야..”
태하는 자신도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 한쪽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돌이 나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는 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예요.
돌의 힘에 눈이 먼 인간이,
천 년 전처럼 이 세상의 파괴자가 되는 것이죠.”
“아주 오래 전,
노들섬을 통째로 집어삼킨 그 사건 아시죠?
'노들섬의 전설'을 만든 그 사건."
“노들섬의 전설?
그게... 진짜라고?”
태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득해진 머릿속은 이제 현실과 허구의 경계마저
점점 모호해지고 있었다.
“설마.. 10시간 뒤에 '그 돌'이 깨어난다는 것도...
사실이야?”
길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스톤헌터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돌이 완전히 깨어나면, 그들은 맹수처럼 돌을 향해 달려들 겁니다.”
태하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럼.. 앞으로 남은 시간은?”
“10시간. 오직 그뿐입니다.”
“혹시 내가 시간여행을 끝내고 해야 될 일이라는게...
‘그 돌’과 관련된 거였어?”
길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백년 간 이 돌 하나를 없애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죠.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어디서도 돌을 감지할 수 없는 곳에,
이 돌을 숨기는 것 뿐입니다.”
“그 중요한 일을,
왜 자네가 직접 안하는 거지?”
“그건.. 제가 직접 해선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마법사는 인간의 운명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방향만 제시할 뿐,
실행에 옮기는 건 인간이어야 하죠.
그래서 인간 ‘페르소나’를 선택해서
그를 통해 실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당신이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던 건,
제가 당신을 페르소나로 선택했기 때문이죠.”
태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높고 푸른 하늘,
그 한가운데 하얀 달이 희미하게 떠 있었다.
‘루나...’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딸의 이름이,
푸른 하늘 위에 조용히 떠올랐다.
하지만, 10시간 뒤면.. 이 잔잔해보이는 평화도
결국 산산조각 날 것이다.
'그 돌'이 불러낼 인간의 탐욕 끝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종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 루나도...
“하겠소.”
태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엔 굳은 결의가 베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줘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돌’이 저 미치광이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숨겨놓을 테니까...”
길재는 태하에게서
다른 어떤 인간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묘한 아우라를 느꼈다.
“그럼 저랑 마지막으로 같이 갈 곳이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길재의 손끝이 목걸이를 두 번 스치는 순간,
그들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그 자리엔, 태하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지갑
하나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검은 그림자 하나가 골목 어귀에서 나타났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다가와,
바닥에 떨어진 태하의 지갑을 집어 들었다.
“분명 여기 있었어... 그 돌이...”
지갑 속 태하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는,
다시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