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잃어버린 남자

by 문득

수천 명의 관객석이 꽉 드러찬

서울의 한 강연장,

무대 위 사회자가 인사말을 시작했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죠?

이 분 하면 ‘타이틀’을 빼놓을 수 없죠.

올해 타임지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포브스지 선정 5년 연속 세계 10대 부자,

대한민국 청년들의 영원한 워너비,

넥소랩의 강태하 대표님을 소개합니다.”


태하가 무대 위로 걸어나오자,

수천 명의 관객석이 일제히 들썩였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오늘 저의 강연회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그는 예전의 강태하가 아니었다.

바버샵 스타일의 세련된 포마드,

고급스런 네이비 블레이저 자켓 위로

금빛 넥소랩 배지와 그의 이름 석자.


‘CEO 강태하’


6년 동안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한 시간에 걸친 강연회가 성황리에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그의 나이 또래로 보이는

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회장님께선 모든 걸 다 갖고 계시죠.

부와 명예, 그리고 아리따운 사모님까지...

회장님께 부족한 건 도대체 뭡니까?”


남자의 농담 섞인 질문에

관객석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태하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음... 저는, 뭐랄까요...

제 과거를 잃어버렸습니다.

제 가장 소중한 보물과 함께 말이죠...”


태하의 아리송한 답변에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옆엔 귀엽게 생긴 꼬마아이가

지루한 듯 남자의 팔을 흔들며 보채고 있었다.


‘루나... 그리운 내 딸...’


6년 동안 한번도 잊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이젠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없는 그 이름...


루나는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존재였다.


그는 끓어오르는 목메임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떨궜다.


“대표님은 무슨 책을 가장 좋아하세요?

대표님의 자서전 말구요, 헤헤.”


한 여학생이 수줍게 웃으며 질문하자,

잠시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밝아졌다.


태하의 입가에도 미소가 살짝 번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음.. 저는 ‘노들섬의 전설’이란 책을 좋아합니다.

아이들의 전래동화로 잘 알려져있죠.”


사실 이 책은 루나가 가장 좋아하던 책이었다.

매일 밤 루나와 함께 그 책을 읽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책 내용을 더듬더듬 읊기 시작했다.


“천년 전, 이 섬엔 요정과 인간, 나는 인간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마력을 구사하는 요정과

월등한 체구로 하늘을 나는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은 가장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온갖 멸시와 차별을 당해야했죠.

하지만- "


관객석은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모두들 태하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인간에게도,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게 바로 '그 돌'이었죠."


순간, 관객석에서 질문이 튀어나왔다.


"설마, 지금 저 밖에서 미치광이들이 쫓고 있는,

'그 돌'은 아니죠?"


태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돌'...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전지전능한 돌이라고 하죠.

저는, 믿진 않습니다만..."


태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나약한 인간은, 이 섬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돌'의 힘을 빌어 나머지 두 종족을 파멸시켰습니다.

다들 평화가 왔다고 들떠있었죠. 하지만-

그건 그들만의 착각이었습니다.

죽은 자들은, 인간이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살도록

치명적인 저주를 퍼붓고갔죠.

남아있던 인간들마저 섬에서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후로, 이 섬은 아무도 살지 않는,

'죽음의 땅'이 되었죠."


"지금은 남태평양의 한 가운데,

작은 점처럼 그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노들섬이라는 이름과 함께...

하지만- 그 누구도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죠.

기묘하고 끔찍한 사건만 쫓는 괴짜가 아니라면요.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노들섬의 전설'입니다."


관객석에 이상한 적막이 감돌자,

태하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쓸데없는 얘길 너무 오래 한 것 같군요.

자,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보죠."


이번엔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의 손엔 작은 수첩과 펜이 들려 있었다.


“작년에 넥소랩의 공동대표가 되신 이후,

김무준 회장님의 군용쏘서 사업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히셨습니다.

최근엔 두 분 사이에 불화설까지 돌고 있는데요.

사실인가요?”


‘언론쟁이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회사의 경영과 관련하여

몇가지 사안에 이견이 있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커질수록 이런 '견제와 균형'이

더 필요합니다. 우린, 기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남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질문을 이어가려 하자,

태하가 조용히 검지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렸다.


“질문은 한 개 씩,

부탁드립니다.”


아까부터 손을 들고 있던 여자가

태하와 눈이 마주쳤다.


“방금 속보가 떴는데요.

최근 노조설립을 추진하던 직원들이

모두 해고됐다는 소식입니다.

항간엔 ‘피의 숙청’이 있었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그게, 정말 사실인가요?”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관객석에

핸드폰 불빛이 하나 둘 켜지더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므로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관객석이 술렁이는 틈을 타,

사회자가 서둘러 마이크를 잡았다.


“네, 이것으로 오늘 강연회를 마치겠습니다.

소정의 기념품으로 대표님의 자서전

‘강태하의 인생 2막’을 준비했으니

다들 성공적인 인생을 꿈꿔보시길 바랍니다.”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서 등 뒤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속삭임이 느껴졌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밖에 대기중인

리무진을 향해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리무진 주변엔 이미 수십 명의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태하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플래시 세례가 요란하게 터지기 시작했다.


“대표님! 노조 탄압, 정말 몰랐습니까?


“이번 해고에 정말 일도 관여 안하셨습니까?”


“대표님! 피의 숙청이 사실입니까?”


수십개의 마이크가 동시에 그를 향했지만,

그는 말없이 고개만 숙인 채 경호원의 보호 속에

간신히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허무하지?’


그의 리무진은 엄청난 카메라 플레시를 뒤로 하고,

어디론가 급히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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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강남 넥소랩 본사


그는 리무진에서 내리자마자

50층 회장실로 향했다.


그 시각, 김무준 회장은 시가 한대를 물고

태하가 강연장을 정신없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입가엔 음흉한 미소가 돌았다.


“회장님!”


태하가 문을 발칵 열고 들어왔다.


“어이쿠, 깜짝이야.

이젠 노크도 안하고 들어와?”


그는 태하가 올거라 예상은 했지만,

일부러 더 놀란 듯 크게 소리쳤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노조 설립을 추진하던 직원들,

당신이 해고한 겁니까?”


“하하, 내가?

인사에 손 뗀 지가 언젠데?

실적도 안 나오던 사람들이 정리가 된거지.

그걸 왜 나한테 따지나?”


“노조 설립을 주도하던 직원들이

한날, 한시에 잘렸습니다.

이게, 우연이라는 겁니까?”


“안 믿으면 어쩔건데?

내가 지시했다는 증거 있어?”


“피의 숙청이라는 말까지 돌고 있습니다.

이게 사실이면, 넥소랩은 여기서 끝입니다.”


태하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그땐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김 회장이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이봐, 강 대표.

이젠 날 회장직에서도 몰아내려는 거야?

이사들을 동원해서 공동대표 자리에 오르더니

이젠 눈에 뵈는 게 없지?”


“이번 사태를 낱낱이 조사할 겁니다.

해고당한 직원들을 증인으로 부를 거구요.

그때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습니다.”


김 회장이 갑자기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곧이어 낯빛이 돌변했다.


“자네만 내 약점을 안다고 생각하나?”


그는 태하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듯,

음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태하는 순간,

왠지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설마, 그가... 내 비밀을?

아니야. 그럴리 없어.’


시간여행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그와 진우,

단 둘 뿐이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태하는 일부러 태연한 표정으로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김 회장의 마지막 말이

계속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