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함의 숭배>
일주한권 책 읽기 프로젝트 - 그 첫 번째 이야기 <똑똑함의 숭배>
서윗한 마음으로 달콤한 글을 선사하는 작가, 서윗 lee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간 여러 가지 핑계로 여러분 앞에 등장하지 않았으나, 이제 다시 각종 책에 관한 리뷰로 여러분들께 돌아오려 합니다.
매주 토요일, 좋은 책에 대한 저만의 생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이주의 책:<똑똑함의 숭배>
제목: 엘리트주의는 언제나 옳은가
본문:
스마트함, 베테랑, 정예, 선량, 훌륭함, 슈퍼스타, 지성적임, 안경, 학사모,...
엘리트를 말하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단어들을 간단하게 열거해 본 것이다. 사람들은 엘리트라 함은 흔히들 책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고상한 교수의 이미지 혹은 서울대에 입학한 최정예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연상하곤 한다.
이렇듯 엘리트라는 것은 우리에게 한편으론 어렵게, 또 한편으로는 높게 느껴지면서도 그 높음의 기준을 ‘지성적인 능력’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사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지적 능력을 발휘하여 엘리트라는 지위를 차지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거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지적 지위나 성취라는 것은 자신이 직접 노력을 통해 얻어낸 것이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인정해줄 뿐 아니라, 넘어서서 그들을 존경하면서도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포인트에서 굉장한 위험함을 감지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백인과 흑인 사이,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차별을 경험해왔고,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고 수정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 아무도 그들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피부색이나 성별 등으로 사람을 대함에 있어 편견과 혐오,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 매우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엘리트를 ‘대단히 위험한 계급’이라고 정의한다. 엘리트가 누리고 있는 결과적인 보상과 특혜들은 사실 다른 인간들이 받는 대우와 비교하여 지나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역사적으로 행해졌던 다양한 차별적 사례들은 비유하자면 겉으로 드러난 상처와 같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상처에 대해서는 굉장히 거슬려하면서 비록 아픔이 따르더라도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능력주의 사회 속 엘리트들이 누리는 차별적 특혜는 속으로 뻗어나가는 종양과 같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엘리트라는 사람들이 누리는 차별적 특혜는, 사실 그것이 인륜적으로 완전히 정당화될 수 없음에도 그 누구도 그것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다.
혹자는
1) 그들의 능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으니 그에 따른 합당한 보상이며,
2) 그런 능력이나 재능의 함양이 그런 혜택을 가져다준다는 자체가 사람들의 자기 계발의 하나의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갖는 특혜의 정당성의 근거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으며, 앞서 두 가지 의견에 대해 하나씩 반박하도록 하겠다.
먼저, 그들의 능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니 그에 따른 보상은 합당하는 주장은 이미 그 주장 속에 엘리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생산해내는 프레임들이 긍정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쉽게 생각해서 아이폰을 개발한 스티브 잡스를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의 개발을 통해 우리의 온갖 생활이 편리해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스마트폰이 보유하고 있는 다양한 기능 때문에 우리 생활이 다채로워지고,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풍요로워졌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감각하기에 시공간적으로 단축되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마트폰이 긍정적인 영향만을 불러온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정보격차가 심해져 세대에 따라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기도 했고, 제3세계에서는 스마트폰에 쓰이는 부품의 생산을 위해 자신의 토착 생활지에서 내쫓기거나 관련 환경을 파괴해야만 하는 상황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편해진 생활만큼 각종 전자 공해, 대기공해, 그리고 각종 폐기물에 따른 환경오염도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결정적인 순간에 인류에게 정확한 긍정적인 역할을 해주는 사람인지 의문시되는 엘리트들에게, 우리는 맹목적인 경제적 부를 안겨준다. 그리고, 적어도 경제적 부유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의식주 및 인간의 기본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을 사용된다. 정리하자면, 모든 인류는 공통적으로 의식주 및 욕구 충족을 원하는데, 보편적인 인류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긍정적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두뇌 놀이에 따른 약간의 편의를 누리면서 그들의 차별적 특혜를 정당화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는 능력주의라는 표피에 가려져 그 상처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 자연스럽고, 조심스럽게 우리 사회를 망가뜨려 놓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차별적 특혜는 그들이 사회에 기여한 것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라는 것에 대한 반박이다.
둘째로, 그런 능력이나 재능의 함양이 그런 혜택을 가져다준다는 자체가 사람들의 자기 계발의 하나의 동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박이다. 사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잘 살펴보면, 어떤 보상이 능력 계발의 동기가 된다는 것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이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서 흔히 엘리트라 불리는 사람들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하나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흔히 성공한 엘리트들은 그들 만의 숨겨진 노력이나 피나는 의지가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할 수 있는 의지조차도 타고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을 바라보면, 자신이 그것을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능력주의라는 이륙장을 기반 삼아 자신의 약간의 노력과 의지를 첨가해 기분 좋게 비상한 경우가 허다하다. 즉,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것이 엘리트가 아니라, 원래 될 것을 이뤄놓고 그것을 좀 더 값져 보이게 포장하는 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 대한 차별적 특혜는 분명한 잘못이다. 우리가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차별을 잘못으로 여기는 이유는 선천적인 피부색을 기준으로,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인간적인 보상의 위계를 나눠놓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보편적인 욕구나 안락 등을 선천적인 특성으로 위계 지어진 백인에게만 쥐어주었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엘리트들도 사실은 대부분이 타고났다. 아니, 거의 전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데도 단순히 후천적으로 비치는 그들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들의 능력은 선천적인 타고남에 기반했음에도 인간적 안락과 욕구를 차별적으로 쥐어주는 것은 기존의 다른 형태의 차별과 다를 바 없다.
이에 나는 엘리트들이 더욱 겸손해지는 방향으로 사회가 진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누리고 있는 특혜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분명히 과장된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향유하고 있는 인간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생활이 순전한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직시하고 적어도 자신이 또 다른 방식으로 차별을 행하지 않도록 행동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런 나의 주장을 보며 굉장히 회의적인 것 같다거나, 독자의 입장에서 내게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면 그걸로 됐다. 어쩌면 나의 주장이 누군가 (혹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게 다가갈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이런 방식의 관점을 선사해주고 싶었다. 함께 고민해보자.
마지막으로, 비슷한 결의 책인 '공정하다는 착각'도 기회가 될 때 읽은 후 브런치 분들께 그 리뷰를 공유하도록 해보겠다는 반쯤 확신 있는 약속을 남기며 글을 마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