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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 철학자 Nov 19. 2022

삶과 죽음의 주변

일주한권 문철환콜 프로젝트- 그 두 번째 이야기 <톨스토이 고백록>


안녕하세요? 서윗lee 인사드립니다!!

 토요마다 책에 대한 한 켠의 글을 쓰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돌아왔습니다.


(지난 한주는 군복무로 인해 쉬었습니다 ㅠㅠ)

이번주부터는 문학과 철학의 환상적 콜라보를 기본 정신으로 삼고 가려함에 따라 프로젝트 이름도 '일주한권 문철환콜'로 재설정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좋은 글로 매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삶과 죽음의 주변>


# 자

# 르트르

# 예술 feat. 문학과 철학의 환상적 콜라보


1) 살아감의 이유

최근까지 이어져온, 이따금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다시 재조명되는 시기에 인간의 삶과 죽음을 함부로 논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경솔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톨스토이의 고백록을 통해서 우리가 평소에 죽음에 대한 선택권을 두고 생각해온 것들을 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여 제4장에 등장하는 '자살'이란 단어를 하나의 키워드로 가져왔다. 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자살하지 않고 삶을 살아가는 근거에 대해 고민해본 글이라 할 수 있겠다.


"오랜 세월 동안 악착 같이 많은 것들을 배우고 발전해서 몸과 마음을 성장시켜 왔고, 그 결과 이제는 성숙한 정신세계를 가지고서 내 인생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상에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내가 서 있는 곳은 절벽이었고, 거기에서 인생에는 과거에도 아무것도 없었고 지금도 아무것도 없으며 앞으로도 아무것도 없을 것임을 똑똑히 보았다."

<본문 중에서>


행복, 사랑, 건강 혹은 머니. 우리는 다양한 관념적 개념들을 목표로 각자의 삶을 충실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운영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비록 그 궁극적인 도달점에서 원하는 것들은 다를지라도, 기본적으로 열심히 살수록 나에게 더 높은 위치와 많은 보상이 따라올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쩌면 정상이라고 믿었던 곳에 올라갔을 때, 그 어떠한 아름다운 경관은커녕, 막상 더 나아가려고 하니 절벽이라는 곳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그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 코로나에 걸렸고, 어른이 된 이후 오랜만에 사회에 있으면서도 술을 일주일 넘게 손대지 않은 시간을 가져보았다. 술이 주는 여러 가지 장점들이 때때로 그리워졌지만 금주의 기간은 내게 삶 자체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데 도움을 주었다. 술을 마시는 이유는 술에 취함으로써 그 자체의 감정을 즐기고, 여러 가지 피곤한 일들을 잊어버리기 위함일 텐데, 그 당시에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반복되는 만취는 인생을 파산시키기에 충분하다. 

  갑자기 웬 술 이야기냐고? 어쩌면 우리가 취하고 있는 건 술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을 알게 된 계기가 있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말하길, 우리 사람은 어쩌면 죽음과 삶 사이에서 삶에 취해 있는 동안에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깨어나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순간, 삶은 그저 사기극일 뿐이고 어리석은 미망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삶을 바로 보아야 보다 인간적이면서도 올곧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술에 찌든 삶이 잘못되었듯, 삶에 마냥 취해서도 안된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죽음 속에서 삶을 영위하려는 것도 그 자체로 역설이 아닌가.


2) 인간 자유로운 존재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에 앞서 우리가 마음가짐 자체를 설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 자체를 사르트르라는 철학자로부터 확인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삶을 살아가는 방향을 찾기 위해 제안되는 여러 가지 사상들이 있겠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인간 실존의 선행성'이다. 이전에 말했듯 인간은 여러 가지 목적을 설정해두고 그것을 얻거나 그곳에 닿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간다. 사실 그런 일련의 행위들 자체는 열정을 가지고 삶을 사려는 의지가 반영된 산물이므로 그런 뜻에 시비를 걸고 싶은 것은 아닐 거다. 다만 사르트르의 격언을 통해서 나 또한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그 자체로 먼저 실존하였고 그 뒤에 쓸모에 관한 미션들이 발생한 것이지, 그 자체로 어떠한 쓸모를 위해 태어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에 기본적으로 우리는 이미 실존한 상황에서 무언가에 쫓기듯 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삶에의 의지만을 갖추어 놓은 상태라면 너무 조급해하면서 우리 자신을 보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실존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실존하는 개체들 이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어떠한 객관적인 가치 체계도, 어떠한 고착된 본질도 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어떤 결계에 얽매여 있다기보다 자유로운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자유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세계 속의 우리를 인식하고 책임질 수 있는 방식을 행위를 선택해 나가야겠다. 론 하이데거와 같이 인간은 본디 불안함이라는 감정을 달고 살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철학자도 있지만 그런 사실이 우리의 자유로운 사고와 삶의 의지 자체를 방해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3) 오히려 죽음을 곁에 두고


그리고 저는 문득 궁금해진 점이 있다. 마치 톨스토이와 같이 말이

" 내 인생 속에는 과연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드시 내게 찾아와 인사를 건넬 '죽음'이라는 메신저로도 파괴되거나 사라지지 않는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가?

그럼 도대체,  인생에 대한 어떤 접근이 우리를 그럼에도 살게 만드는 것인가.


책에서는 네 가지 부류가 있다고 전한다.


1. 무지하거나 2. 의도적으로 쾌락만을 좇거나, 3. 힘으로 해결하거나 혹은 4. 약하게 시간을 끌며 버티거나.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사실 톨스토이가 말하듯 우리 삶이 부조리하면서도 터무니없는, 허망한 것 그 자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죽음의 특성에 대해 무지하다거나 혹은 마음이 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명하고 있다고 믿기는 싫다. 그러면서도, 내가 다른 많은 즐거워하는 타인들처럼 열심히 살아가면서 이런 '글' 마저도 작성한다는 것에는 이유가 궁적인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과연 무엇이 이성이 도출한 결론을 무시하면서까지 삶을 영위하게 만들어 줄 것인가.


혹자는 기독교, 불교, 천주교 따위로 일컬어지는 각종 종교의 형태를 띤 신앙을 통해서 삶을 지속할 힘을 겟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신앙을 통해서만이 삶은 악이라고 규정하는 이성이 부르짖는 지식의 소리를 무시한 채 그럴듯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한한 것의 허구성을 인식한 이상 무한함을 이야기하는 무언가에 기대지 않고서는 살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톨스토이도 자신의 자서전인 고백록에서 일단락 짓기를, 자기 자신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영위하는 삶이란 틀림없이 불행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이와 같은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인자'(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일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 죽음과 동시에 산산조각 나는 것과 달리 인자로부터의 빛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어른이 된 이후, 이성적인 판단에 기초한 삶의 비중이 굉장히 커진 나머지 아무런 명목도 없이 막연하게 이성적 사고를 거부하고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목소리에 나는 큰 설득력을 느끼지 못했다. 외려 있지도 않은 탈출구를 억지로 만들다가는 구멍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내가 지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에 나는 새로운 쪽으로 눈을 돌려 삶의 이유를 탐색했는데, 그때 내게 그럴듯하게 눈에 띈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예술'이란 놈이다.


4) 예술에서 삶에 대한 영감을 얻다


  나는 삶의 궁극적인 동기의 원천 중 하나에 관한 답을, '예술'이라는 분야에서 찾았다. 보통 사람들이 예술 작품 속에서 또 다른 창작이나 행위에 있어서의 직간접적인 영감을 받는다면, 나는 예술을 통해서 비로소 삶 자체를 살아갈 합리적인 감성을 전달받은 것이다.


예술이라는 분야가 가지는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이 나를 이유 있어 더 살게 만든다.


첫째, 예술이라는 힘으로 이성 자체를 마비시키는 방법이다. 여러 현인들 뿐만 아니라 나 또한 이성이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열매 중 하나라는 것을 부정하거나 할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이성을 통해 도출한 결론이 삶이라는 것이 부질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마비시켜서 잠시나마 삶 속에서 행복을 도모하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다는 것. 그리고 예술은 다른 많은 것들과 달리 그럴 수 있는 충분한 힘과 자격을 지닌다.

  어떻게 예술은 우리의 사고를 정지시키고 그 자체로 행복을 전해주나. 바로,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내게 전달해주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책, 연극, 영화, 그림, 음악 등 비록 그 형식은 다양할지 모르지만 그것들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로 나에게 은근하게 전달해주는 감동이 존재한다. 2호선을 타고 가다 노을 진 한강변을 바라보면서 듣는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은 그 가삿말을 곱씹게 해 준다기보다 우리의 감정을 북돋아준다. 봉준호의 기생충을 보면서, (물론 사회적 메시지를 해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가 만드는 특유의 유머 코드에 묘한 웃음을 지으며 잠시나마 현실의 것들을 잊어낸다.

  이처럼 예술은 이성 자체를 마비시키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삶을 살아갈 이유를 준다.


둘째, 예술은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던 이성의 범위나 한계를 허물어준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그렇게 최고로 여기는 '이성'은 하루아침에 짠 하고 탄생하는 것이 아님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성 자체가 포괄해서 표현하거나 힘쓸 수 있는 범위는 유동적이다. 그리고, 그런 이성은 우리가 알지 못하던 것들에 대해 알게 되는 순간 그 대상의 범위가 확장되곤 한다.

그렇다면 예술이 어떻게 그 범위에 영향을 끼칠까. '새로운 앎', 즉 지식의 추가는 새로운 관념이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옴으로써 형성되는데, 그러기 위한 사전 작업이 바로 '상상' 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각종 예술은 우리의 상상력을 늘려주는 최고의 도구가 되곤 한다. 인간이 오감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동물인 이상, 단순히 문자로 된 교과서를 지속적으로 공부한다고 상상력이 길러지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예술은 그런 한계점을 타파하고 우리의 공감각적인 심상을 자극하여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으로의 생각을 지향하게 도와준다.

  감각 동물인 인간이기에, 오감을 통해 접해보지 못한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측면에서, 예술은 확실히 우리의 상상력을 배가시켜주고, 그 늘어난 상상력으로 우리는 이성적인 사고를 더 넓은 마당에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그런 일련의 행위나 현상이 반복되다 보면, 우리가 기존의 이성으로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에서의 진리도 깨달을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그런 희망 정도면 우리가 기존의 이성적 사고로 판단한 비관적인 생각을 뚫고 한 번 줄기차게 열심히 살아볼 동기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일 테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중2병 걸린 친구들에게 훈계할 때나 쓸 것만 같은 "삶이란 원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살아라."와 같은 문장으로 합리화하며 살기에는 무언가 아쉬운 감이 있다. 우리가 그 끝에 도달해서도 알기 어려운 것이 삶이라는 무한한 스펙트럼이니, 그것을 유한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분명히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일 텐데 말이다.


아직은 살 날이 더 많이 남았기에 오늘의 숙고를 바탕으로 더 배워나가고자 한다. 오늘, 여러분들의 삶에 대한 태도는 어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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