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밤의 꿈, 그 보이지 않는 손
달러구트 꿈 백화점, 그리고 나
1. 프롤로그
"파스릇하고 피톤치드한 푸근함이 내게 아스라하게 안겨온다."
6월의 여름 아침, 다를 바 없는 싱그러운 아침날에 나는 집앞에 나와 홀로 필승 체육관 앞을 거닐고 있다. 아침식사를 위해 떠난 길의 일부이기도 했지만 유난히 오늘은 필-체 앞 토끼풀 밭에 오랜 시간을 지체하고 있다. 다를 것이 없는 날에, 다를 바 없는 똑같은 길에서 색다른 감정을 느끼며 각종 풀과 꽃들이 주는 파스릇하고 피톤치드한 아늑함을 느끼고 있는 이유의 발단은 단 하나의 사건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때론 그 무엇보다 선명하고 강렬한 그것. 그렇다. 내가 평범한 아침 길에 감성을 두 수푼 첨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새벽에 꾸었던 '꿈' 덕분이었다.
2. 꿈 백화점,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나
책 <달러구트의 꿈 백화점>에서는 그 직원이자 이 책의 주인공인 '페니'를 통해서 이러한 꿈에 대한 다각도의 모습들을 동화적으로 전해준다. 잠을 자야만 가게에 입장할 수 있고, 사전 예약을 아무리 열심히 해두어도 잠이 들지 못하면 'No-show' 처리되어 버리는 달러구트의 백화점.
---
띵동 - '첫사랑의 꿈' 대가로 설렘이 소량 지출되었습니다.
달러구트가 꿈을 판매하고 비용을 지불받을 때 나는 소리다. 그의 백화점에서는 모든 꿈에 대한 비용이 효과를 본 사람에 한해 후불제로 운영된다. 효과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어떠한 비용도 청구하지 않는다. 이처럼 그의 백화점은, 여러가지 판매 방식에 있어서 그 매니징이 우리가 갖고 있는 기성 소비관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묘하게 우리의 현실세계와 가치관들을 잘 담아내는 볼수록 매력적인 가게이기도 하다.
앞서 내가 달러구트의 백화점이 동화적으로 그려진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안에 등장하는 꿈과 각종 콘텐츠들은 적어도 아이들에게만 비춰지거나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그렇다면 달러구트 씨의 백화점이 어떻게 이렇게 유명해질 수 있었고, 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 그 컨텐츠를 직접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는 임산부들을 위한 꿈을 취급한다. 일종의, 태몽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달러구트와 친한 유명 꿈 제작자인 아가냅 코코는 예지몽의 형태로 아이를 갖게 될 사람들의 꿈을 제작한다. 그녀는 일종의 데자뷰-방식을 이용하는데, 새로운 생명에 대한 강한 기운을 꿈의 형태로 저장하여 사람들에게 판매하고, 그들이 혼란없이 미래에 대한 자기확신을 갖게 끔 도와주는 것이다.
또, 꿈 백화점에서 제작되는 꿈 중 일부는 '한밤의 연애지침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꿈 제작자들은 꿈을 통해서 다양한 연애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몇 년간 짝사랑에 그치고 있지만 확신이 없어서 상대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직간접적 체험을 선사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진실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미련 때문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겐 말끔히 그 감정을 해소시켜주기도 한다. 그 대가로는 효과를 본 고객들로부터 설렘이나 후련함 등을 비용으로 지불받는다.
이처럼, 달러구트씨네 백화점에서 다양한 종류의 꿈들을 취급하여, 현실 속 소비자들의 기호와 기분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첫사랑과의 데이트, 막연한 미래에 대한 대략적 암시 등 흥미로운 꿈들은 항상 인기가 많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부류의 꿈은 따로 있다. 바로, 달러구트가 악몽을 만드는 뒷골목 제작자들과 계약을 통해 제작해낸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꿈'이다.
3.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꿈
3-1. 발상의 전환
트라우마, 그리고 극복... 극복은 분명 긍정적인 단어가 맞는데, 트라우마는 부정적 뉘앙스가 강해보인다. 즉,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꿈은 사실 누구에게나 한 두개쯤 존재하는 가장 힘들었다거나 충격적인 사건을 꿈속에서 재현시킴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부정적 기억을 직면하게 만든다.
'과연 부정적 기억을 표현하고 안좋은 감정을 담아내는 꿈이 도움이 될까?' 하고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충분히 그러한 생각이 이해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마음에 나마저도 격히 공감 마저 된다. 현실마저 각박하고 힘든게 사실인 상황에서, 굳이 우리의 달콤한 수면 시간을 일종의 악몽(?)으로 점철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걔다가 우리가 나름의 비용을 지불하고 꿈을 선택할 수 있는데 굳이 사서 겪어야 할까 라는 생각마저 드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절대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장황한 진술을 한 이유는 나는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을 전환하면, 트라우마 극복 꿈의 긍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
3-2. 나의 힘든 기억
잠시만, 아주 잠시만 내가 서두에서 이야기한 나의 꿈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앞서 내가 필체 앞에서 오랜만의 행복을 누린 일을 언급한 바 있다. 여느 때와 비슷한 길 속에서 잠시나마 고단하고 힘겨운 군생활을 잊고, 나를 싱그러움과 푸근함 속에서 여유를 갖고 노닐게 해준건 첫사랑과 테마파크에 가는 낭만적인 꿈도, 나의 전역일이 내일 모레로 다가오는 짜릿한 꿈도 아니었다. 그날, 어쩌면 가장 평범했을 지도 모를 필승 체육관 앞 풀길을 특별하게 만들어준건, 내가 고3 때 갑자기 돌아가셨던 큰아버지가 출연한 꿈 덕분이었다.
< 고3이라 함은 사실 누군가가 보기에는 다 큰 청소년이자 어른 직전의 사람으로서 마냥 다 성장한 사람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타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듯 사실은 아직 정신적, 문화적으로 아직 어린 아이일 뿐이다. 그 당시의 나 또한 신체만 거의 성장했을 뿐, 아직 배울점이 많은 모자란 아이였고, 그런 그때의 나에게 큰아버지의 갑작스런 심정지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
당시 고3으로서 수능을 목전에 두고 겪었던 갑작스런 이별은 아직까지도 얼떨떨한 느낌을 전달해준다. 특히나 셋째 큰아버지는 나의 학업과 생활에 유별난 관심을 보여주셨던 분이었다. 틈만 나면 내신을 잘 준비되고 있는지,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물어봐주시던 그 분의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귓가에 선명할 정도다.
사실 그 일이 있기 며칠전만 하여도 여느때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고3 막바지 스퍼트를 달리고 있었고, 나의 학업에 유별난 관심을 가지셨던 큰아버지도 언제나처럼 나에게 전화를 걸어 시덥잖은 조언을 해주시며 나의 소중한 휴식 시간을 뺐어가고 있었다. 그 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아직까지 그 분의 전화 음성이 귓가에서 떠나가기도 전인 며칠 뒤에 나는 그 분을 목메어 부를 수만 있을 뿐, 더 이상 그 대답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분이 전화를 감사하게 생각하기는 커녕 시간 낭비라고 여겼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통곡할 수 밖에 없었다.
다들 가족이 아닌 사람이 남의 죽음 앞에서 많은 눈물을 보이는 것이 결례라고들 한다. 만약 그것이 크나큰 결례가 맞는 것이라면, 나는 결국 큰 결례를 범했다. 몇 시간을 달려간 그 분의 장례식장 앞에서 나는 결국 무너져버리고 만 것이다. 우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도 신경쓰지 못할만큼 통곡을 하고 울어버렸다. 큰아버지,,,ㅠㅠ
3-3. 그리고, 다시 현재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비행단에서 복무를 마치고 잠을 자는 불쌍한 조카에게 그 분은 소리도 없이 찾아오셨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시다니,,,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큰아버지의 깜찍한 장난 때문에 나는 힘들었던 예전 기억이 연상되었고, 잠을 자면서도 내내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나니 이게 웬걸. 반복되는 풍경과 일상에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내게 산뜻한 여유 한 모금이 축여져 있었다. 아무래도 힘들었던 기억을 회피하기보다 그것을 제대로 마주보고,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여 극복해낸 것이 나에게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렇게 큰아빠가 꿈 속에서 건네준 여유 한 모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가던 길의 풀잎 모양과 색깔, 향기는 물론이거니와 나의 가능성이나 역량과 같은 추상적인 실재들마저 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사건을 담은 꿈 덕분에, 나는 지루한 관성적 행동에서 벗어나 정신적, 물리적으로 더 나은 삶과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4. 꿈을 통한 마주함, 그리고 극복
다시, 백화점으로 돌아가서, 나는 위와 같은 이유로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일종의 부정적 기억을 담은 꿈 판매를 옹호한다. 아니, 오히려 적극지지하고 나서서 홍보할 것이다. 아마도 백화점 주인인 달러구트도 위와 같은 효과를 노리고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꿈' 자체를 시리즈물로 제작하여 추천 판매 대상에 올려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실제로 책 속을 살펴보면, 잠자리에 들어 꿈을 사간 손님은 '저출산으로 인한 재입대의 꿈', '고교 기말고사 D-1로 돌아가는 꿈'과 같은 끔찍한 악몽을 그 백화점에서 사가게 된다. 사실, 그러한 일종의 악몽을 꾸고 깨어난 직후에는 어떻게 이따위 꿈을 팔 수 있냐며 백화점으로 환불을 요청하러 오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런 사람들에게 달러구트는 '구매 확정 서약서'를 보여주며 조금 더 기다려보는 것은 어떠하겠냐고 조언하듯이 이야기한다.
* 고객들이 직접 서명한 서약서, 그 중의 두, 세 번째 조항은 다음과 같다.
< 둘째. 구매자가 꿈을 꾸고 잠에서 깼을 때,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 비로소 판매자에게 꿈값이 지불되고 계약이 성립한다.
셋째. 제품의 특성상, 구매 후 1개월 이내에 다른 꿈으로의 교환 및 구매 취소 요청이 가능하나, 어차피 잊어버리고 재구매하실 확률이 크기에 권장하지 않습니다.>
위 서약서를 다시 읽어본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성급함을 돌아보고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성급하게 철회한 사람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직접 꿈 속에서 마주한 이전의 어려움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헤쳐나가게 된다. 결국, 그들은 자신감과 자부심을 비용으로 지불한다. 즉, 회피가 아닌 극복을 택했고, 그들은 충만해진 자존감 높은 사람들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꿈은 비록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일지 모르지만,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비대할지도 모른다. 꿈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막연한 것일지라도 위에서 설명했듯 그것은 우리에게 마음의 치유와 정신적 쾌유를 전달해주기도 한다. 경제학에서의 보이지 않는 손이 수요와 공급을 조절해준다면, 꿈학에서의 보이지 않는 손은 아무도 모르게 우리의 마음건강을 책임지고 조정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오늘 밤에도 약손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단함을 살며시 보듬어주고 위로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5. 에필로그
하, 쓰다보니 이런저런 묘한 감정이 든다. 이런 감정을 더욱 즐기기 위해 테라스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졸리다. 이제 글을 마친다.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이 밤, 나는 이제 또 한번 꿈을 꾸기 위해 침대라는 기차에 탑승해보려 한다. 모두들 좋은 꿈 꾸시길..!
띵동 - '한 여름 밤의 휴가 나가는 달콤한 꿈' 의 대가로 제 10 전투 비행단에 행복이 대량 입고되었습니다.
에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