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코끼리 족(2)
아침 일찍 여섯 스승은 수련장에 모였다.
여섯 스승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묻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태랑이가 오지 않았다. 성질이 제일 급한 수참이가 참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태랑이 이 녀석 웬일로 정신 차리고 수련을 열심히 하나 했다. 야! 정말 태랑이 녀석 같이 가도 괜찮은 거 맞아?”
이때 항상 조용한 태린이도 수참이를 거들고 나섰다.
“그러니까. 태랑이 녀석 무서워서 가기 싫다고 도망 가 버린 거 아냐? 어둠의 군대랑 싸운다는 말에 잔뜩 겁 먹어서 말이야.”
“다들 느꼈잖아. 요즘 태랑이가 정말 열심히 수련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도망간 건 아니겠지? 우리 중 누가 젤 빠르지? 수참이 네가 젤 빠르니까 태랑이한테 갔다 와 볼래?”
우진이 태랑이 편을 들고 있을 때, 수련장 한 구석에서 태랑이가 힘겹게 걸어 나왔다.
하루 사이 태랑이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태랑이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걸음까지 비틀거렸다. 그 모습이 걱정된 성호가 태랑이에게 달려가 어깨를 부축하며 물었다.
“태랑아, 무슨 일이냐? 너 어디 아픈거냐?”
태랑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여섯 스승의 얼굴을 한 명씩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 저녁에 수연이가 만들어준 주먹밥을 열다섯 개나 먹었어요.”
여섯 스승은 그때서야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이는 비틀거리는 태랑이를 말에 태웠다.
이제 여섯 스승과 태랑이의 출발 준비는 모두 끝났다.
태랑이는 아무 힘 없이 우진의 등에 얼굴을 기대고 몽롱한 눈빛으로 그저 말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자! 모두 출발하자고.”
우진이 말의 옆구리를 힘차게 구르며 먼저 출발했다.
토족 성호와 화족 수참이는 말과 같은 속도로 함께 달렸다.
목족 오후와 금족 미르는 같은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미르 위에는 수족 태린이가 올라타고 있었다.
태랑과 여섯 스승은 남쪽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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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남쪽 수족 마을에 도착했을 때, 주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사람의 인기척, 생물의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저기 부서진 수족의 집만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수족의 집과 나무에는 칼같이 날카로운 것에 찔려 부서지거나 구멍이 난 기둥들이 땅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꼭 코끼리 족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공격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오후가 흔적을 살피며 모두에게 말했다.
“이번 공격은 한 명의 공격이라고 보기 어렵겠는데, 적어도 세 명 이상은 마을을 공격한 것 같아.”
오후의 말을 들은 미르가 부서진 기둥 조각을 살피며 대답했다.
“역시 듣던 대로 어마어마한 힘이군. 코끼리 족이라면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여기 부서진 기둥을 한 번 봐봐. 여러 번 부딪힌 게 아니야. 딱 한 번, 딱 한 번 때렸는 데 기둥이 산산조각나고 말았어.”
벽에 난 구멍을 살펴보고 있던 오후가 다시 모두에게 말했다.
“여기에 난 구멍은 칼이나 화살의 흔적이 아니야. 게다가 같은 높이에 같은 간격으로 구멍이 두 개 씩 나 있어. 무언가 단단하고 일정한 높이를 가진 것이 여기를 찔렀다는 말인데. 도대체 그게 뭘까?”
“내가 듣기로는 코끼리 족에게는 뾰족한 상아가 있다고 들었어. 그것도 양쪽에 두 개. 그러니까. 일정 한 높이에 두 개의 구멍이 있다면 그건 분명 코끼리 족의 상징인 상아일 거야.”
우진은 밤이면 보던 책에서 오래 전 종족들의 특징을 공부했다. 그래서 코끼리 족의 특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우진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진의 말을 들은 태랑이와 여섯 스승들은 다시 흩어져서 코끼리 족의 흔적을 더 찾아보기로 했다.
마을 주변을 어슬렁어슬렁거리던 태랑이는 문이 다 부서져 너덜너덜해진 집을 발견하고는 살며시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모두 부서지고, 기둥은 허리가 꺾여 있었다. 태랑이는 부서진 문을 힘껏 밀었다. 하지만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 열기를 포기한 태랑이는 양손에 힘을 주고 문을 부셔버렸다.
태랑이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집 안은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부서지지 않은 가구가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벽, 천장, 기둥할 것 없이 모든 곳에 두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그때였다. 조용한 실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랑이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컹 내려 앉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아주 작지만 계속 들려왔다.
어두운 집 안에는 누군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용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태랑이는 정신을 집중하고 손끝에 기를 모았다. 그리고 수참이에게 배운 기술을 쓰기 시작했다. 한동안 정신을 집중하자 손끝에서는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태랑이는 손 끝에 생긴 불꽃을 집 안 구석구석 날려보냈다.
태랑이의 불꽃이 닿은 어둠은 점점 밝은 빛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어두운 집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태랑은 자신이 날려보낸 불꽃에 의지해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서진 책상과 의자, 곧 무너질 것만 같은 지붕, 태랑이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또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였다.
- 바스락, 바스락, 탁, 탁, 탁. -
그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또 들렸다. 태랑이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태랑이가 느끼기에 소리가 나는 쪽은 분명 주방이었다.
태랑이는 주방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소리는 뒤집어진 식탁 뒤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태랑이는 성호가 가르쳐 준 방법 대로 손에 기를 모았다. 태랑이의 손 주위로 조그만 빛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태랑이는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틈을 노렸다.
그리고 곧 식탁을 향해 손바닥을 펴고 손을 뻗었다. 태랑이의 손에서 보이지 않는 기가 날아갔고, 넘어져 있던 식탁은 반으로 갈라졌다.
그곳에는 이불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다. 이불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만 같아 태랑이는 다시 손에 기를 모았다.
- 바스락, 바스락, 펄럭, 펄럭. -
분명 이불 속에 누군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어딘지 모르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태랑이는 성호가 가르쳐 준 기를 주먹에서 사라지게 한 후, 태린에게서 배운 물의 주문을 외웠다.
태랑이는 이불을 걷어내며 동시에 엄청난 양의 물을 날릴 생각이었다.
태랑이는 물의 주문이 없는 손으로 이불 끝을 잡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이불을 확 잡아 당겼다.
태랑이는 이불을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손바닥 위에 올려진 물을 그 속으로 던져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불 속에는 수족 어린이 세 명이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태랑이는 서둘러 불의 주문을 외워 손바닥에 있는 물을 불로 중화시켰다. 손바닥에 있던 물은 손끝에 생긴 불과 마주쳐 곧바로 소멸되었다.
이불 속에는 언니로 보이는 가장 큰 수족 어린이가 두 동생을 꼭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태랑이가 이불을 젖히자 수족 언니가 태랑이를 보며 말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당신들을 보았다고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요. 제발 목숨만 살려 주세요.”
수족 언니는 양손을 모아 불이 날 정도로 싹싹 빌었다. 태랑이는 먼저 애들을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들아, 걱정하지 마. 우리는 너희를 헤치지 않아. 우리는 일족 족장님이 보내서 왔어. 코끼리 족이 나타났다고 수족 족장님이 말씀하셨거든. 그러니까. 나는 너희들을 도우러 온 거야. 너희들을 절대 헤치지 않아.”
그때서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수족 언니가 고개를 들고 태랑이를 바라보았다.
수족 아이들은 코끼리 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일족의 모습을 한 태랑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안심한 듯 깊은 숨을 몰아 쉬었다.
“정말, 대족장님과 수족 족장님이 보내서 오신 거예요? 우리를 구하러 오신 거예요?”
수족 아이의 말에 태랑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큰 소리로 스승님들을 불렀다.
“성호 아저씨, 수참 아저씨, 우진 아저씨, 태린 아저씨, 미르 아저씨. 여기 수족 아이들이 있어요.”
태랑이의 목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태린이었다.
같은 수족인 태린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은 더욱 안심이 된 듯 태린에게 달려가 안겼다.
태린은 수족 아이들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곧 이어 다른 스승들도 모두 집으로 들어왔다.
태린이는 아이들과 눈 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가장 큰 언니에게 물었다.
“얘들아, 어떻게 된 건지, 이 아저씨에게 설명해 줄 수 있겠니?”
수족 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까지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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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 언니의 말에 따르면 이곳 마을은 수족들이 평화롭게 모여 살고 있는 작은 어촌이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기저기 구멍이 난 난파선 한 척이 마을을 향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자신의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 몇 명이 다친 사람들은 없는지 배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배 안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공중으로 붕 뜬 채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배 안으로 들어갔던 수족 어른들 모두가 공중으로 던져진 채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재빨리 땅에 떨어진 사람들을 부축했으나, 땅에 떨어진 충격으로 이미 다친 사람들을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배에서 갑자기 쿵쾅쿵쾅 무거운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처음 본 종족 셋이 배에서 내렸다.
배에서 내린 종족은 갑자기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인정사정없이 마을 사람들을 때리고 짓밟기 시작했다. 그때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처음 보는 종족의 발에 밟히고, 코에 찔려 돌아가셨다고 수족 언니는 눈물을 글썽였다.
수족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집으로 도망가자 처음 보는 종족 셋은 무작위로 집을 때려부시고 수족 사람들을 찾아내 무차별적으로 집어 던지고 죽였다.
상아에 걸린 수족 어른들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날이 밝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자신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이곳에 남았다고 수족 언니는 눈물을 쏟으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더 끔찍한 일은 마을이 조용해지자 일어났다고 수족 언니는 눈물을 더욱 글썽이며, 동생들을 끌어 앉았다. 동생들은 언니의 품에 안겨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처음 본 종족은 죽은 수족 사람들을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는 부서진 기둥과 문, 책상 같은 나무들을 모아 불을 지폈다. 그 불 속으로 죽은 수족 사람들,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포함하여 죽은 사람들을 하나 씩, 둘 씩 던져 넣었다.
그렇게 한참 불이 타오르고 높이 치솟았던 불이 꺼지자 처음 본 종족은 새카맣게 탄 수족 사람들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셋은 무서워서 그냥 문틈 사이로 그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와 아빠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그을렸지만, 누가 아빠이고, 누가 엄마인지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수족 언니는 동생들의 입을 틀어막고, 어금니를 꽉 물고 눈물을 참았다고 말했다.
아침이 되자 처음 본 종족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밤이 되면 또 나타나 불을 지피고 수족의 시체를 뜯어 먹었다고 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아침이면 사라지고 밤이 되면 나타나 죽은 수족을 찾아내 차례차례 뜯어 먹은 지 벌써 일주일 째라고 수족 언니는 서럽게 울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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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 언니의 말을 다 들은 태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다니, 태린은 분노에 가득 찬 주먹을 바닥을 향해 내리 꽂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우진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그 괴물 같은 녀석들 생긴 모습은 봤니?”
아직도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수족 언니가 울음을 삼키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큰 귀에 긴 코, 커다란 뿔을 가지고 있었어요. 뿔은 양쪽으로 두 개가 나 있었고요. 그런데 무엇보다 무서운 건 여기저기 하얀 뼈와 붉은 근육이 보였다는 거예요. 마치 시체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뼈와 근육이 보인다는 건 분명 어둠의 군대일 것이다. 이미 멸족한 종족을 어둠의 아이가 또 살려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할 수는 없었다. 태린은 아이들을 보고 말했다.
“얘들아, 지금 이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겠니? 이 마을을 빠져나가 북쪽으로 올라가거라. 북쪽 수족 마을, 수족 족장님이 있는 마을까지 가서 태린이 아저씨가 보냈다고 말해라. 그럼 너희들을 보호해 줄다.”
태린이는 아이들을 이끌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이들을 마을 밖까지 데리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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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태랑과 다른 스승들은 아이들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수색을 더 열심히 했다.
그때 수참이 한 집 앞에 멈춰 서서 모두를 불렀다.
“모두 이리와 봐. 이 흔적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아?”
수찬의 물음에 성호가 흔적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조용히 냄새를 들이마셨다.
한참 동안 냄새를 들이마시던 성호가 말했다.
“그래, 이건 어둠의 상흔이야. 어둠의 아이가 부활 시킨 코끼리 족이 맞는 것 같아.”
다른 흔적을 살펴보던 오후도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도 어둠의 상흔이 있어. 이건 분명 어둠의 상흔이 맞아. 아니라면 흔적이 이렇게 남을 수가 없어.”
우진도 다른 흔적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네. 여기에 특히 어둠의 상흔이 많네. 이 집이 가장 많이 부서진 걸 보니 이 집을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 같아.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지?”
아이들을 마을 밖으로 보내고 돌아온 태린이 더욱 비장한 얼굴로 모두에게 말했다.
“아이들 말대로 바닷가로 가봐야지. 코끼리 족은 분명 난파선 안에서 어둠이 오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