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일족의 만행(2)
우진이 태랑이를 데리고 들어왔을 때, 관아 마당에는 여러 개의 횃불이 켜져 있었다.
일족의 대장은 높은 의자에 앉아 태랑이를 깔보듯이 째려보며 우진에게 말했다.
“하하하! 그 조그만 녀석이 빛의 아이라는 것이냐? 과연 그 녀석이 어둠의 아이로부터 이 별을 구할 수 있다고? 너희는 정말 그렇게 믿는 것이냐? 어리석은 것들.”
“대장님. 대장님은 아직 빛의 아이가 가진 실력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하하하! 그 조그만 녀석을 보니 안 봐도 실력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조그만 녀석이 이 별을 구한다니. 하하하! 내가 들어 본 농담 중에 가장 재미있는 농담이구나”
일족 대장의 비웃음에 태랑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일족 대장의 밑에는 대족장이 피로 벌겋게 물든 옷을 입고 포승줄에 묶인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태랑은 당장 달려가 대족장을 묶은 포승줄을 풀고 밖으로 데려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일족과의 전쟁이 일어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우진이 일족 대장을 향해 말했다.
“혹시 어둠의 아이를 보셨습니까?”
“본 적은 없지만, 이미 어둠의 아이가 나타났다는 것은 일족 모두가 안다. 임금께서도 걱정이 크시지.”
“어둠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 여기 있는 이 빛의 아이도 함께 태어났습니다.”
우진은 태랑이를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둠의 아이와 저 꼬마 녀석이 나이가 같다는 말이냐?”
“네! 어둠의 아이와 나이가 같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아이도 꼬마겠지요. 천오백 년 전의 싸움도 어둠의 아이와 빛의 아이의 싸움이었습니다. 수많은 종족이 멸족을 했지만, 어둠의 군대에 맞서 이긴 것은 바로 빛의 아이입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 있지 않겠느냐? 그런데 그런 꼬마가 무슨 힘이 있다는 말이냐?”
“빛의 아이와 어둠의 아이는 전설 속에서도 자신들이 가진 최대의 힘을 발휘해 싸웠습니다. 거대한 군대와 군대의 싸움이었지만, 거대한 힘과 힘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일족들이 어둠의 군대와 함께하지 않고 모두 빛의 군대와 함께 했다면 지금과 같이 큰 피해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허! 이놈, 무엄하도다. 어디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당대의 임금은 어둠의 아이가 가진 힘을 믿었다. 어둠의 아이가 가진 악의 기운을 이용하여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자 하신 것이다. 세상에는 빛도 필요하지만, 어둠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진은 일족 대장의 대답에 정말 어이가 없었다. 당시 어둠의 군대에 붙은 일족은 다 자신들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다.
임금 역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둠의 군대에 수많은 병력을 지원했었다.
그 사실은 살아남은 모든 종족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악을 없애고 평화를 찾기 위해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싸웠다고…….
우진은 당장 일족 대장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일족과 여섯 족장, 여섯 스승은 전투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어둠의 아이와 싸우기도 전에 엄청난 피해를 가지고 올 것이다.
일족의 군대를 상대하기에는 아직 모든 종족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일족은 군대를 만들어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잦은 싸움을 벌여왔다. 그러니 싸움에 능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족을 뺀 다섯 종족은 어둠의 아이가 나타난 이후 다시 싸움의 기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우진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지금 당장 일족 대장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렇다면, 빛의 아이. 여기 있는 이 아이의 실력을 보신다면 믿어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어둠의 아이와 맞설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드린다면 대족장님을 풀어주시고, 저희들의 말을 믿어 주시겠습니까?”
“만약 빛의 아이라는 저 꼬맹이가 우리의 정예부대를 이긴다면 너의 말을 인정하마. 그리고 대족장이라는 자도 풀어주도록 하지. 그러나 저 꼬마가 우리의 정예 부대를 이기는 것은 어림없을 일일 것이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겁니까?”
“난 한 입으로 두 말은 하지 않는다. 빛의 아이가 이길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빛의 아이와 함께 할 것이다. 하지만 빛의 아이에게 아무런 힘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어둠의 아이와 함께 할 것이다. 세상을 유지시키는 것, 일족의 멸족을 막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임무다.”
우진은 다시 쓴 웃음을 지었다. 일족의 임무라는 것, 그건 일족이 가진 권력의 질서와 부를 지키는 것, 단지 그것 뿐이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건 싸움에서, 이 별과 영원히 이별하게 될지도 모르는 싸움에서, 고작 부와 권력을 위해 자신을 바친다니…… 한심한 일족들.
우진은 다시 어금니를 꽉 깨물고 태랑이를 바라보았다.
“태랑아! 자신 있니?”
“걱정 마세요. 우진 아저씨. 제가 대족장님을 구해내고 말테니까요.”
일족 대장은 자신이 들고 있던 부채를 활짝 펼쳤다. 그리고 부채로 입을 가리고 옆에 있는 관리에게 무엇이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관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준비 되었느냐? 자! 이제 싸움을 시작하거라.”
“와아아아아아!”
일족 관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러 명의 장병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마당을 가득 채웠다.
훈련이 잘된 일족 정예 부대는 순식간에 대열을 맞춰 태랑이를 마주보고 섰다.
부대의 인원은 어림잡아 60명은 될 것 같았다. 아니 태랑이가 보기에는 정확히 60명이었다.
제일 앞 줄에는 칼과 방패를 든 20명이 서 있었다.
그리고 중간에는 창을 길게 뽑아든 병사 20명이 칼과 방패를 든 병사들의 빈틈을 채우고 있었다.
마지막 줄에는 총을 든 20명이 총을 땅에 세우고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도록 자세를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우진은 어쩌면 태랑이가 잘 훈련된 군사들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족장님을 살리기 위한 방법은 이것 하나 밖에 없었다.
빛의 아이가 얼마나 대단한 지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 그래서 빛의 아이에 대한 믿음을 여기 있는 일족에게 심어주는 것. 그 방법 말고는 없었다.
우진은 근심어린 표정으로 태랑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태랑이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태랑이는 그런 우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진을 향해 한 번 씨익 웃어주고는 어깨와 목을 풀었다.
- 우드득, 우드득. -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한 관아에 울려퍼졌다.
우진은 태랑이의 머리를 세차게 쓰다듬고는 뒤로 물러섰다.
우진은 지금까지 수련했던 결과를 믿기로 했다. 아니 수련의 결과를 믿는 것 말고는 어떤 방법도 없었다.
태랑이는 여섯 종족의 모든 기술을 습득했으니,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우진은 그 확신을 믿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랑이는 그런 우진의 눈빛을 보며, 한 쪽 눈을 찡긋 윙크를 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관아 앞 마당에는 태랑이와 60명의 정예병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태랑이는 먼저 활을 꺼내들었다.
제일 앞에서 칼을 들고 있던 부대가 등 뒤에 메고 있던 방패를 꺼내 태랑이의 화살을 막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칼을 든 부대는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태랑이가 진짜로 노리는 대상이 칼을 든 부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태랑이는 활을 한 발 장전하고 활 시위를 세차게 당겼다.
제일 앞줄에서 방패를 든 병사들이 방패와 방패 사이를 서로 엇갈려 든든한 방어막을 형성하였다.
태랑이는 그것을 보고 활시위를 비틀어 당겼다. 활시위는 더욱 팽팽하게 당겨졌다.
활시위가 팽팽해지자 태랑이는 활시위에 매겨진 활에서 손을 놓았다.
태랑이의 손을 떠난 화살은 바람 소리를 내며 병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 쉬이이익. 쉬익. 쉬이익. -
제일 앞 줄에서 방패를 촘촘하게 만들고는 날아오는 화살을 막으려던 병사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방패를 향해 화살이 날아 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화살은 방패를 향해 날아가지 않았다. 화살은 위로 솟구쳐 올랐다가 방향을 틀어 아래로 떨어졌다.
방향을 튼 화살이 노린 것은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창을 든 부대였다.
화살은 아래로 떨어지며 뒷줄에 있는 창을 든 병사들 사이를 파고 들었다.
태랑이 쏜 화살은 마치 뱀처럼 허리를 비틀며 상하좌우로 튀어올랐다. 태랑의 화살에 창을 들고 있던 병사들 다섯 명이 쓰러졌다.
태랑이의 화살에 맞은 일족의 병사들은 발목이나 발등을 잡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비명을 지르며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태랑이는 다시 활시위에 활을 장착했다. 그리고 활시위를 더욱 세게 당겼다.
태랑이의 화살이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이것을 본 부대원들은 쓰러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방패를 들고 반원을 만들었다.
하늘에서 화살이 떨어져도 막을 수 있게 방패 역시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것이었다.
그들은 방패를 더욱 견고하게 겹쳤다.
하지만 태랑의 화살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 방패에 이리저리 피하며 병사들 안으로 파고들었다.
“으악!”
“으아악!”
방패 안에 있던 부대원들의 비명 소리가 방패를 뚫고 세어 나왔다. 부대원들은 쓰러진 사람들을 그 자리에 두고 옆으로 옮겼다.
태랑이의 두 번째 화살은 일곱 명의 창병을 스치고 지나간 듯 했다.
태랑이의 화살 두 번에 12명의 부대원들이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옆으로 옮겨간 부대는 더욱 옹기종기 모였다. 태랑이는 한 번 더 활 시위를 비틀어 팽팽하게 당겼다.
태랑이의 화살은 또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병사들 사이를 파고 들었다.
태랑이는 곧 이어 화살을 한 발 더 쏘았다. 두 개의 화살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병사들 사이를 휘젖고 다녔다.
태랑이 노린 것은 이번에도 창병이었다. 창병들은 태랑이의 화살에 모두 나가 떨어졌다.
스무 명의 창병은 신음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다.
창을 든 부대원들이 다 쓰러진 것을 보자 칼을 든 부대는 방패의 공간을 넓혔다.
그러자 방패 사이사이로 총부리가 나왔다. 그리고 스무 발의 총알이 태랑이를 향해 날아왔다.
총소리를 들은 태랑이는 커다란 불꽃을 만들어 앞으로 던졌다.
스무 발의 총알은 불꽃에 닿아 녹아버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날아가 방패에 불을 붙였다.
칼을 든 부대는 방패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총을 든 부대가 다시 총알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태랑이는 총을 든 부대에게 물줄기를 발사했다.
그러자 불이 붙은 심지가 물에 젖어 꺼져버렸다. 총을 든 부대가 아무리 불을 붙이려 해도 물에 흠뻑 젖은 총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이를 본 검을 든 부대가 태랑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태랑이는 등에서 쌍검을 꺼냈다. 오후 덕분에 어느새 태랑이도 검술에는 자신이 있었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순식간에 스무 명의 칼이 떨어지고 스무 명의 칼을 든 병사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태랑이는 마치 오후처럼 칼을 든 부대원들 사이를 휘젖고 다녔다.
태랑이 휘젖고 지나가자 칼을 든 병사들은 저마다 팔이나 발을 잡고 고통을 호소했다.
총을 든 병사 스무 명이 계속해서 총에 불을 붙이려 노력하고 있었다.
태랑이는 이제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손가락 끝에 작은 불꽃을 만들어 두 번에 걸쳐 총을 든 병사에게 던졌다.
총 스무 개의 불꽃이 병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불꽃은 조총에 불을 붙이려고 노력하는 병사들의 소매에 붙었다. 그리고 태랑이는 그 불꽃을 향해 크게 기합을 넣었다.
“이야아아아압.”
병사들의 소매에 붙은 불꽃은 더 커졌다. 병사들의 소매에 불이 커지자 조총의 심지에 불이 붙었다.
병사들은 옷에 붙은 불을 끄느라 조총을 제대로 잡지도 못했다. 공중에는 조총들이 마치 별똥별 같이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불이 붙은 병사들은 온갖 발악을 하며 서로의 몸에 불을 끄려고 난리쳤다.
어떤 병사는 머리에 쓴 모자까지 불이 붙었다. 혼비백산한 병사들을 향해 태랑이는 물줄기를 날려보냈다.
옷이 홀라당 탄 병사들이 태랑이의 물줄기에 쓸려 바닥을 뒹굴었다.
태랑이는 가볍게 육십 명의 병사를 물리쳤다. 일족 대장은 이 장면을 지켜보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이니 일족 족장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자신의 체면을 구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일족 족장은 고민에 빠졌다. 빛과 어둠. 어느 편이 더 좋은 것인가?
그 사이 우진이와 태랑이는 일족 족장을 부축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섯 족장과 다섯 스승은 대족장을 함께 부축하고 일족 마을로 돌아와 대족장을 방에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