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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집착하는 사회

by bonfire

희망은 인간 사회의 가장 오래된 신념 중 하나다. 고대 그리스의 판도라 신화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 ‘희망’이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그것에 기대어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희망이 언제부터인가 ‘집착’이 되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희망을 요구한다. 광고는 “더 나은 내일”을 약속하고, 정치인은 “변화의 시작”을 외친다. 교육은 “성공을 위한 준비”를 강조하고, SNS는 “꿈을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로 넘쳐난다. 우리는 희망을 소비하고, 희망을 경쟁하며, 희망을 강요받는다.

이런 구조 속에서 희망은 더 이상 위안이 아니라 압박이 된다.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때로 현실을 부정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지금의 고통, 지금의 실패, 지금의 불안은 희망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다. 우리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척해야 한다. 왜냐하면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낙오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철학자 자크 라캉은 인간 욕망의 구조를 설명하며 “결핍이 욕망을 만든다”고 했다. 희망 역시 결핍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 결핍을 직면하지 않고, 희망만을 추구할 때 우리는 현실을 잃는다. 희망은 방향이 되어야지,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희망에 대한 집착은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도 나타난다.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던 시기, 많은 청년들이 “희망이 없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이중적인 감정 속에서 무기력과 분노가 자라났다.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희망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희망을 다뤄야 할까? 희망을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희망을 재정의해야 한다. 그것은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의 선택이어야 한다. 희망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희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용기 또한 필요하다.

희망은 인간을 움직이게 한다. 하지만 그 희망이 인간을 억누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멈춰 서서 질문해야 한다. “나는 왜 희망을 가져야 하는가?” 그 질문이야말로 진짜 희망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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