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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사탕 Feb 18. 2022

투에고의 '나는 가끔 내가 싫다가도 애틋해서'를 읽고

마음의 위안을 준다면

책을 처음 봤을 때 제목에 있는 비어있는 공간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내가____싫다가도'의 의미는 내 스스로가 가끔 싫어질 때, 나를 바로 쳐다보기 힘들 때의 느낌일까? '싫다가도____ 애틋해서'는 싫은 것과 애틋한 것의 사이에 숨어있는 다른 감정을 채우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순간 나는 내 스스로가, 내가 하는 행동이, 혹은 내 마음이나 생각이 싫어진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왜 그렇게 못나게 굴었을까, 왜 그때 더 용감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라고 여겼다. 이런 생각을 돌려서 하는 것은 나를 더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작가는 나처럼 그런 줏대 없는 단호함이나 기준 없는 철벽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 더 애틋하고, 스스로에 대해 더 마음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지도 모르겠다.


제목 아래 쓰여진 부제목은 후회와 미련이 새벽을 삼켜도 수많은 아침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라고 되어 있다. 투에고라는 작가의 필명이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아마도 인스타나 페이스북 같은 곳에서 사람들과 소통을 많이 하는 작가인 것 같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현재가 고통스러워 불행할지라도

지나고 나면 한낱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세상살이라는 그림자에

너무 잠식당할 필요는 없다.


만약 인생이 통째로 하나의 꿈이라면 내 현실과, 꿈은 어느 쪽이 사실일까? 나는 어느 쪽을 선택하고 싶을까.



뜨거웠던 것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점점 식어갈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마음속 어딘가에 그 자국은 남아 있다. 


첫사랑에 대한 작가의 단상에 잠깐 마음이 움찔했다. 맞다. 마음 한구석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뜨거웠든, 혹은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붉게 물들기만 했던 말이다.


어쩌면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시사철 피어 있는 것이 아니기에

눈부시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괜스레 갈증이 나서 커피를 들이켰다. 평소 즐겨 마시던 아메리카노가 그날따라 유독 쓰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누가 이렇게 쓴 걸 마시나’ 싶던 커피 맛에 어느새 참 익숙해졌다. 우리 삶도 때로 참 쓰디쓰지만, 그게 꼭 나쁘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원두나 로스팅 과정에 따라 커피 맛이 다르듯, 우리의 인생도 저마다 자신만의 향과 풍미가 있을 테니까.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잠깐씩 멈칫하는 것은 가끔 그런 느낌을 가졌던 순간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의 생활에서 흔히 마주쳤던 장면들을 작가가 다시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 때의 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비슷하게 느끼는 부분도 있고, 때로는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보여서 신선하다. ‘아, 이렇게 느낄 수도 있구나.’ 이런 새로운 느낌 말이다.


미련에 대한 글에서,


이제는 미련을 갖는 일이 조심스럽다.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을 후회하는 그 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지다 보니, 예전보다 단념하게 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이따금 미련이라는 괴물이 찾아올 기미가 보이면, 아무리 괴롭고 슬퍼도 현재의 나를 자각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래야만 나를 지킬 수 있어서이다. 


중년이 지나가고,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끔 미련을 갖는다. 그 때,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지금 우리 아이들이 다르지 않을까? 나에 대한 미련은 이제 그다지 많이 생각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지만 가끔 내가 한 선택이 아이들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많이 미련을 가지게 된다. 어쨌든, 이미 지난 선택이고 나를 지키려면 나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세월 흐르면 결국

몇 안되는 사람만 남을 뿐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모든 관계에 연연했을까.


몇 개의 글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읽을 때 문득 놀라웠다. 젊은 작가인 것 같은데 이렇게 나와 같은 생각이라니. 나이와 상관없이 관계에 대한 생각은 대부분 비슷한 걸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렇게 친했던 친구들과도 어느 순간 멀어져 있고, 연락처만 남을 때가 많다. 도리어 전혀 오래 갈 것 같지 않던 직장 동료와 아직도 연락을 주고 받기도 하고, 주변에서 만난 사람과 함께 밥을 먹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참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관계다.


오늘도 나는 감정이라는 속살을 전부 드러내지 않기 위해 옷을 입는다. 나날이 마음의 기온이 낮아지는 탓에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목도리까지 꽁꽁 싸맨다. 물론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타인에게 또 상처를 줄까 봐, 아니면 자신이 힘들까 봐,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 조심스럽기만 하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단을 통제하는 우리는 점점 온기를 잃어간다.


누군가와 함께 한 여름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또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삶은 절망과 희망,

딱 그 사이에 있다.


정말 그럴까? 삶이 절망과 희망 사이에 딱 놓여져 있을까? 나는 도리어 절망 쪽에 많이 갔다가, 희망쪽으로 다시 움직이는 그 움직임 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힘을 얻는게 아닌가 싶다. 늘 희망에만 있어도, 일상이 아무 문제가 없기만 해도 행복하다고 느끼기 어렵다. 절망에 있다가 희망으로 옮겼을 때, 그 때 살아있다고 느끼지 않는가. 중간에 있는 것보다 삶이 그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는 표현이 나에게는 더 현실적이다.


나만은 나를

당신을 끝까지 믿고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 줄 아나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에요.


이 글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거에는 누군가 함께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끝까지 기다려줄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기대를 접었다. 나 스스로 말고는 나를 기다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나 자신도 가끔은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는가. 어쩌면 그래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나를 쳐다보고 믿고 기다리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어떻게 버텨낼까?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자신의 글이 누군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덜어줄 수는 없겠지만, 똑같은 감정의 파도를 겪는 이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면 좋겠다고 썼다. 책을 읽는 중간 중간 ‘비슷한 마음’을 느끼는 일이 많았다. 아마도 많은 읽는 이들이 그럴 것 같다. 책 안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 그게 책을 읽는 이유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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