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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사탕 Oct 14. 2021

이금이의 '페르마타, 이탈리아'

정류장, 잠시 멈춤


코끝이 찡해져 할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가 내린 정류장 표지판엔 페르마타 라고 씌어 있었다. ‘페르마타’는 정류장, 잠시 멈춤이란 뜻이기도 하지만 악보의 늘임표를 부르는 단어이기도 하다. 음표나 쉼표에 늘임표 기호가 있으면 본래 박자보다 두세 배 길게 늘여 연주해야 한다.


페르마타라는 단어에 여행의 본질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잠시 멈추어 평소엔 바쁘다가 밀쳐두었던 것들을 여유 있게 생각하는 것, 실은 평소 일상에서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들이다.


요즘 동화책을 많이 읽으면서 자주 접하는 책의 작가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중 대표적으로 알고 있는 이금이 작가. 요즘 동화 말고 어른 소설로도 읽을 수 있는 작품이 기억이 났다. 너도 하늘말 나리야, 유진과 유진이라는 청소년 소설로 유명했고, 최근에는 알로하, 나의 엄마들이라는 소설이 어른들을 위해 쓴 작품이다. 늘 그녀의 책을 읽고 나면 마음 한편이 부스스 소리를 낸다. 무슨 뜻일까? 그냥 쉽게 넘어가지 못하고 늘 무언가를 깨우거나, 가슴 한편이 아리거나, 혹은 눈물이 난다. 그래서 이번 에세이를 읽으면서도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다행히 에세이는 이탈리아를 1달가량 여행한 긴 여행기라서 크게 힘들게 읽지 않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여행은 1달간 유럽만 여행해도 대단하게 결심했구나 할 텐데 1달간 딱 한 나라, 그것도 이탈리아를 여행했다니 신기했다. 여행 광처럼 이곳저곳을 열심히 스케쥴을 짜서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나 같은 초보 관광객에게는 턱도 없는 선택이다. 그래서 더 부러웠다. 한 나라를 정말 자세히 보고, 머물고 싶을 때 머물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는 여행. 어쩌면 출발하고, 도착하는 비행기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수시로 변경하면서 다니는 것이 맞는 여행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내 가방이 떠올랐다. 익숙하고 편안해진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의 집합체였다. 그 무게 때문에 여행의 즐거움이 얼마나 반감되는지 이동할 때마다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었다. 기차를 타고 가다 풍경이나 역 이름에 끌려 충동적으로 내리는 낭만을 꿈꾸었으나 가방을 생각하면 악몽이 됐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기차를 오르내리는 것도 큰일이었지만 빈 짐칸을 찾기도 어려웠다. 짐칸에 넣지 못하면 가방은 애물단지가 됐다. 부피가 커서 선반 위에 올릴 수도 없었다. 당장 시에나를 떠날 때 오르막 계단을 끌고 올라갈 일이 걱정이었다.


가끔 여행을 떠나면서 작가처럼 가방을 줄이지 못하고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여행을 힘들게 만들 때가 있다. 아무리 그래도 가방을 포기하지 못한다. 가방뿐이겠는가, 유명한 관광지에는 꼭 가봐야 하고, 어딘가를 가면 유명한 음식을 먹어봐야 하고...... 그냥 포기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것을 알고도 포기하는 일인 다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내가 온순하고 말 잘 듣는 아이였던 건 착한 아이 콤플렉스 때문이다. 자라서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로 이어져 무던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내 본성은 꽤 예민하고 까탈스럽다는 걸 나이 들수록 느끼고 있다. 착한 아이 노릇을 하며 억눌린 채 살아야 했던 내 안의 아이는 충분히 이해받고 존중받기 전에는 아마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동화를 쓰는 건 동심을 간직한 순수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라지 못한 그 아이 때문임이 분명하다. 


가끔 우리 어른들 안에는 아직도 다 아이가 남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착한 아이든, 나쁜 아이든 내 안에 억눌린 것들을 담아둔 아이는 늘 내 안에서 부딪히고, 때로는 울고 있다. 그 목소리를 들어주기도 쉽지 않은 것을 많이 느끼게 된다. 여행을 떠나면 아마도 이 아이를 더 마주하게 되는 것 같다. 작가가 그랬듯이 말이다. 때로는 야단을 쳐야 하지만 때로는 그냥 토닥토닥 위로를 좀 해주고 싶어진다. 이렇게 일상과 떨어진 이탈리아 어느 도시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다니 신기하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위험한 도시라는 사람들 말만 듣고 나폴리에 가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것들이 많았다. 스파카 나폴리의 골목도 보지 못했을 테고, 산세베로 성당의 ‘베일 쓴 그리스도’같은 신비로운 작품도 몰랐겠지. 누오보 궁에 올라 나폴리 전경과 바다, 베수비오 화산도 물론 보지 못했을 거다. 무엇보다 나폴리 사람들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기차역 매표소 직원, 노점상, 가게 점원, 식당 웨이터, 길을 가르쳐준 할아버지..... 잠깐 스쳐 간 사람들조차 흥 많고 유쾌하고, 친절하고, 인정이 넘쳤다.  


이렇게 어딘가 낯선 도시에서 인정 넘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따뜻하다고 느끼는 도시를 만난 것도 그렇고, 도시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던 것도 기억에 남나 보다. 이런 여행기를 읽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곳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다시 어제를 떠올려보니 비에 젖은 집들이며 일찍 불을 밝힌 거리도 분위기 있고, 비구름 피어오르는 풍경도 특별했다. 그런데도 그 자체로 즐기지 못하고 남들이 경험한 포지타노와 비교하며 아쉬워했다. 오늘의 나는 또 어제 그 순간을 누리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고 있다. 폼페이에 먼저 왔었더라면, 한순간 최후를 맞이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본 뒤였다면 내가 맞은 순간 그대로의 포지타노를 즐길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런 이치를 폼페이 같은 곳에 와봐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깨달음의 기회로 삼을만한 일들은 이미 살면서 숱하게 겪었다.


고대도시 폼페이, 고스란히 간직한 최후의 날 속에서 나는 또 처음인 것처럼 내가 살아있음을, 지금, 여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포지타노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형태가 그 모습을 알 수 있도록 남아 있는 흔적을 보면서 어찌 되었건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는 과연 잘살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물어도 이 질문에는 대답이 너무 어렵다.


예순을 맞이하는 게 두렵다고 호들갑을 떨며 여행까지 준비했지만 사실 나는 언제나 내 나이를 좋아한 편이었다. 쉰이 넘어서도 나이 밝히는 걸 주저했던 적이 없다. 저절로 흐른 세월이 아니라 성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도달한 나이 아닌가. 그동안 살아낸 세월 덕분에 웬만한 방지턱은 여유롭게 넘을 수 있는 삶의 내공을 갖게 됐다. 지금 내가 누리는 여행의 호사도 따지고 보면 시간과 돈과 마음의 여유가 생긴 덕인데, 그 또한 이 나이여서 가능한 일이다. 


이제 쉰이 넘은 나이 때문에 자꾸 망설이고, 두렵다. 할 수 없는 것이 점점 많아지고, 신경질도 늘고, 나이가 들수록 더 여유 있을 줄 알았는데 더 답답해질 때가 많다. 이렇게 나이 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지면 마음의 여유는커녕 도리어 답답하기까지 하다. 천천히 도달한 나이니까 두려워하지 않고, 그 나이가 가지는 풍성함과 내공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를 먹어도 욕심이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마지막 에필로그에 글쓰기가 여행과 다른 점은 퇴고를 통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고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행은 수정할 수 없다고. 그래서 인생과 닮았다고 말이다. 다행인 점은 이번 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삶이나 다음 여행에 반영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책의 제목처럼 페르마타, 정류장에 멈추듯이 잠시 내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 잠깐 여유 있게 멈추어서 나를 그대로 바라보는 것, 동시에 두려움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이후에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나를 멈추게 만드는 것 같다. 여행이든, 내 삶에 대한 고찰이든 잠시 멈춤은 나를 숨 쉬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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