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의 이름으로 남긴 시간”
그때 나는 그랬다
사랑을 하고 있는지,
사랑을 하고 싶은 건지,
사랑을 흉내 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뜨겁게 시작된 건 아니었다.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느꼈고,
그 마음이 나를 안정시키는 기분이었다.
편안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해보려고 했다.
날 좋아해주는 마음에 기대서
나도 그만큼 마음을 키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혹은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다.
성격도 괜찮았고,
마음 써주는 모습도 고마웠다.
내가 그 사람을 향해 “이런 점이 참 좋다”고 말했던 건
거짓이 아니었다.
하나하나 기억에 남는다.
다만,
마음이 불타지는 않았다.
함께 있는 게 지루했던 건 아니었지만,
심장이 뛰지도 않았다.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시간은 없었고,
하루만 안 봐도 허전한 날은 오지 않았다.
그저 오늘 봤고, 내일 또 본다면
‘아, 또 보네’ 정도의 감정.
거기에 설렘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무언가 부족했다.
이 관계는 참 조용했다.
말이 없어도 어색하진 않았고,
그걸 이상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침묵이 괜히 자꾸 걸리기 시작했다.
이게 편안함인지,
혹은 우리가 서로에게 더 이상
물어보고 싶은 게 없는 건지
헷갈렸다.
그 사람은
변함없이 나를 좋아해줬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내가 그 마음만큼
같은 크기의 감정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동안 난 계속
결정을 미뤘다.
이별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괜히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래도 이 사람이 싫은 건 아니잖아.’
’싫은 게 없는데 헤어져야 하나?’
’아직 모르겠는 건데 굳이 끊어야 하나?’
이런 생각들이
내 마음을 계속 붙잡았다.
사실은,
이 관계를 끝내는 일이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귀찮고, 어렵고, 번거롭고
그리고 왠지 모르게
무서울 것 같았다.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불안,
좋았던 순간을 쉽게 버리는 것 같다는 죄책감.
그 모든 게 겹쳐
나는 이별을 회피했다.
그냥 계속 만나면,
언젠가는
사랑이 스며들지 않을까 싶었다.
나중에 돌아봤을 때
지금이 제일 바보 같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몇 번은 더 만나보자고
내 마음을 설득했다.
하지만 내 안의 감정은
매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좋아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좋아했었다.
좋은 기억들도 분명히 많다.
함께 웃었던 날,
눈 마주치며 아무 말 없이 걸었던 날,
내가 서운했던 걸 말했을 때
진심으로 미안해하던 얼굴.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씩 시큰거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마음으로
계속 만나는 것이
우리 둘 모두에게
조금씩 상처가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졌다.
이 관계는
지금 여기에서 멈추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이 아니면
어쩌면 더 늦게,
더 어지럽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누군가를
머리로 사랑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안정적이니까,
조건이 괜찮으니까,
나를 좋아하니까.
그렇게 이유 있는 사랑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마음은
이유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랬다.
복잡한 감정 속에서
자꾸만 조용해지고,
아무것도 결심하지 못한 채
그 사람 옆에 앉아 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좋아해보려 했던 시간들이었다.
지금도 그 기억을
나쁘게 남기고 싶진 않다.
아마 앞으로도
그 사람과의 순간을 떠올릴 때
어느 계절의 햇빛처럼
따뜻하고 조용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