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인 사랑
아직 어린 나도, 알고 있었다. 안정적인 사랑이 좋다는 것을. 함께하는 시간이 편안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사랑은 결국 서로에게 쉼터가 되어주는 일이라는 것도. 그런데도 나는, 그런 사랑보다 불같은 사랑을 원했다.
손끝이 닿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하루를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그 사람이 머릿속에 가득한 사랑. 누가 먼저 연락했는지를 계산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애타는 마음. 그걸 나는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여전히 그렇게 믿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을까. 안정적인 사랑이 눈앞에 놓였을 때, 나는 어딘가 현실감이 없었다. 분명히 함께한 시간은 따뜻했고, 좋았던 순간이 더 많았고, 내가 “이런 점이 좋아”라고 말했던 것들도 다 진심이었다. 그건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이, 불타지는 않았다.
여러모로 나는 이 안정적인 사람을 좋아해 보려고 노력했다.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상처받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에게 잘해줘서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좋아하지 않아서 상처받을 일이 없었던 것 같다 . 마음을 내주지 않는데 상처받을 일이 있을까?
같이 있는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시간이 끝난 뒤,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편하긴 했지만, 그 편안함은 안도감보단 어떤 정적에 가까웠다. 그냥 끊을 이유가 없어서 이어지는 관계처럼 느껴졌고, 나도 모르게 그걸 외면하고 있었다.
이별은 회피하고 있었다. 그 수고스러움이, 그 감정의 무게가, 그 이후에 찾아올 귀찮음이, 혹시나 모를 후회가 — 나를 계속 그 자리에 머물게 했다.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 아쉬움이 사랑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사랑도 있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안정적인 사랑, 내가 어른이 되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사랑.
하지만 나는 아직 어린듯, 마음은 여전히 그 불같은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감정을 계산하지 않아도 저절로 흘러넘치는 사랑. 그런 걸 바라는 나는 아직 덜 자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현타가 왔다. 안정적이지만 심장이 뛰지 않는 사랑, 편안하지만 두근거림 없는 관계. 어쩌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흉내 내고 있던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랑의 ‘모양’뿐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나의 감정을, 아주 조용히 직면하게 되었다. 사실 오래전 부터 내가 알고있었던 것 같다. 좋았던 건 분명 사실이지만, 지금 이 마음으로 계속 이어갈 자신은 없었다. 그런 마음을 남긴 채, 지금의 나는 천천히 다음 장을 넘기려 한다.
내가 언젠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제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의 이 망설임과, 이 회피의 흔적들을. 그리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런 안정적인 관계를. 하지만 아직 어리숙하고 사랑을 잘 모르겠는 나는 지금, 그저 조용히 이 페이지를 접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