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유명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관람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 공연은 원작인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을 신구, 박근형, 박정자, 김학철 등 연극계의 거장들이 나와 열연을 펼친 작품이다. 막이 오르면 나무 한 그루 앞에서 에스트라공과(신구) 블라디미르(박근형)이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린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도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막연히 기다린다. 그가 올 때까지 지루함을 달래고자 춤도 추고 잡담하고 행인(포조, 럭키)과 실랑이한다. 반복되는 하루에 두 노인이 지쳐갈 때쯤 나타난 소년은 “고도 아저씨가요 오늘은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다고 전해달래요.” 두 노인은 이 말 한마디에 오늘도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은 막을 내린다. 소년은 양치기일까, 희망인걸까.
작가는 우리 인간이 모두 각자의 고도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무대 위에서 재현한 거라고 하였다. 주인공들은 서로의 대화를 잘 듣지 않고 소통이 안 되며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를 열심히 기다리기만 한다. 고도는 누구에겐 신이고, 명예이고, 희망이며, 성공이겠지. 하지만 작가는 고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본인도 알지 못하며 만일 알았다면 책에 썼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고도는 내게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은 언제 오나, 나의 고도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은데, 오고 있으려나, 어디쯤 왔을까? 나는 내 인생의 절정일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지 즐거운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10년 전 생각이 났다. 우리 아이 다섯 살 즈음 시할머니 댁 칼바람이 들어오는 15평 남짓 주택 단칸방 생활을 하던 시절이다. 난방이 소용없던 집이라 아이들 두 볼은 늘 빨갛게 터서 내복을 두 겹씩 입혔고 우리 식구는 실내용 텐트 안에서 자야했다. 적은 월급에 아파트 마련 때문에 들어가는 대출 이자가 매달 100만원이 넘었다. 그때는 이 빚만 없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대출 없는 삶이 그 당시의 고도였음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신기한 건 그토록 기다리던 내게 고도는 찾아왔지만, 빚 청산의 홀가분함은 어째서 일주일을 채 못 갔을까.
우리는 내가 취직만 하면, 사업만 대박 나면, 우리 아이가 스무 살이 되면, 내가 퇴사만 하면 등등 그 순간만 기다리면서 산다. 그날이 오면 연금술사가 나타나 황금을 손에 쥐어 주리라 호언장담하면서. 하지만 황금을 손에 넣는 순간 그것은 모래로 변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뿐이다. 기쁜 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으며 권태라는 익숙함이 먼저 와서 나를 갉아먹을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푸코의 추>에서 “사람들은 어떤 결정적인 순간 생사를 정당화한 그 순간이 이미 지나간 줄 모른 채 평생을 ‘결정적인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살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을 꼬집는 말이다. 50년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은 고도를 기다렸던 그들이 고도를 직접 찾아 나섰다면 막을 내릴 즈음에는 친구들이 춤을 추고 있었을까?
고도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삶에 조용히 왔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존재여서, 우리는 그가 언제 다녀갔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기다림만 반복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가 싶다. 결론은 내 인생 가장 빛나는 순간이란 때가 되었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는 삶 속 고도가 잠깐 들른 찰나의 달콤함을 기억하는 것이 아마 화양연화일 거라 결론 내렸다. 인생의 반짝이는 시절은 없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만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