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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by 싱클레어

장자크 아노의 영화 <연인>은 주인공의 어린 시절 경험을 소설로 담아내었다. 글을 쓰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그러지 못했던 그녀는 후에 작가가 되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과거를 회상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종이 위 만년필의 사각거림과 풋풋하고 앳된 소녀의 모습이 내 귀와 눈을 사로잡았다. 새침한 표정, 헐렁이는 원피스와 묘하게 어울리는 중절모자, 낡은 구두, 가지런히 땋은 양갈래 머리와 어색하게 바른 립스틱까지. 성숙하고자 했지만 미성숙한 소녀를 잘 표현한 감독의 의도된 연출이었으리라.


둘의 인연은 필연적이었을까? 서로에게 이끌리게 될 것이라 직감했던 것일까? 그들의 아리송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덜컹거리는 차로 표현하며 새끼손가락이 닿는 순간 그들이 연인이 될 것이라고 우리 모두는 직감할 수 있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시작한 부둣가에서 만난 그들은 어느새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지옥 같은 집, 답답하고 엄격한 기숙사, 남자에 대한 호기심, 무기력한 엄마, 내면의 답답함이 범벅이 된 현실 속에서 만난 중국 남자는 그녀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도피처였다. 그로 인해 알게 된 시장 안에 있는 파란 대문의 ‘독신자의 집’은 남자에 대한 첫 경험의 두려움과 호기심이 교차하는 곳이자 그녀가 양갈래 머리 소녀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숙녀로 탈바꿈할 장소이다. 또한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일탈의 장소이며 쾌락의 해우소 역할을 한 야릇한 둘만의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나를 가장 슬프게 만들었던 장면은 남자가 결혼하고 프랑스로 돌아가는 그녀가 쇼팽의 <왈츠> 피아노곡에 이끌려 커튼 뒤에서 그동안 숨죽여왔던 감정을 토해내며 엉엉 우는 장면이다. 이제껏 그가 사랑이 아니라고 자신의 감정을 부인해왔지만 결국 그를 좋아하고 있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아이처럼 우는 그녀의 모습에 내 마음도 같이 먹먹해졌다. 피아노의 시인인 쇼팽 음악과 너무나 잘 어우러지는 달빛은 슬프게도 너무 낭만적이다.


또한 배를 타고 떠나는 소녀를 바라보기 위해 부둣가에서 기다리는 그의 차를 보는 순간 안타까움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심전심’을 너무 기가 막히게 표현해낸 장면인 것 같아서. 서로가 마지막임을 직감하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운명이 그저 지나가는 대로 서로 바라만 보는 순간이다. 뒷좌석에 앉아 있을 그를 클로즈업하지 않은 담담한 연출에 슬픔이 더욱 배가되었다.

작가는 열여덟에 이미 늙어버렸다고 읊조린다. 두 번 다시 이러한 강렬한 사랑에 빠질 수 없음을 예감한 표현일까. 어린 소녀가 한 남자를 만나 여자가 되고 사랑에 빠지고 기숙사에서는 창녀 취급을 받는 처지에도 그때의 과거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는 두 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지 못하는 현실과 다시는 겪지 못한 사랑임을 알기에 사랑에 빠지기 힘든 마음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불같은 사랑을 평생 간직하다가 결국엔 글로 풀어낸 한 여성 작가의 삶을 보며, 과거의 빛나는 시절 열지 않은 상자에서 수십 년간 추억을 꺼내먹고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질 결심> 메인 포스터인 주인공의 새끼손가락 장면이 <연인>을 오마주 한 느낌에 웃음을 지었고 베트남의 이국적인 풍경과 독신자의 방이 있던 촐레의 시장이 정겨웠다. 그 시장통의 소란 속에서도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한 정사 씬은 더욱 기억에 남는다. 너무나 섹시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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